후손을 조상묘 위쪽에 모시는 `역장`…더이상 禁忌 장례 풍습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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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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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례 문화의 특징 중에 족장(族葬)이란 게 있다. 한 장소를 택해 일족의 조상을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초에 들어와 새로 생긴 풍습이다. 그 이전은 ‘한 자락의 산에는 하나의 혈만이 있다’는 풍수적 관념에 얽매여 있었다. 왕가와 사대부의 능묘가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이유다. 지금도 그런 풍습을 따라 부부간도 몇 십리를 떨어뜨려 각기 모시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정으로 보면 두 분을 마땅히 합장하거나 쌍분으로 가까이 모셔야 한다. 하지만 길지를 택해 자손을 잘 되게 하는 것이 부부가 저승에서 화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중국에서는 정도가 심해 거리가 백 리가 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풍습은 단점이 많다. 성묘하기가 불편하고, 묘를 지키고 단장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 세월이 지나면 후손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워 묘를 잃어버리는 폐단도 있다. 이런 단점을 시정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족장이다. 조선의 태조도 건원릉을 중심으로 주위에 8능을 정했다.

삶에 지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고향 산자락엔 어김없이 조상을 모신 선영이 있다. 숨이 턱에 찰 즈음이면 잔디가 산 위쪽까지 곱게 펼쳐진 선영이 나오고, 마치 윗 대조 할아버지의 훈시를 듣는 것처럼 줄을 맞추어 조상들이 모셔져 있다. 여기에도 원칙은 있다. 후손의 묘를 조상의 아래쪽에 두는 것이다. 만약 후손을 조상의 묘 위쪽에 모신다면 소위 ‘역장(逆葬)’이라고 해서 매우 흉하다고들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금방 변하지 않는 장례 문화가 바로 역장이다. 옛 선조들은 과연 역장을 하지 않았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유학과 예학에 밝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역장을 자연스럽게 택했다. 충남 논산에는 양반 가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광산 김씨 선영이 있다. 그곳에는 조선 예학의 거두였던 김장생 선생의 묘가 있다. 그 분은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우고 예학을 깊이 연구했다. 당시 예에 대한 의문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로 와서 문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영을 살펴보면 김장생의 묘가 노송이 병풍처럼 에워싼 맨 위쪽에 자리잡았다. 문중을 일약 명문가로 일으켜 세운 양천 허씨 할머니보다 위쪽이다.

파주의 자원서원에 있는 이이 선생의 묘도 부모의 묘보다 위쪽에 자리잡았고, 파산학파를 세워 조선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킨 성혼 선생의 묘 역시 아버지 성수침의 묘보다 위쪽에 모셔져 있다. 역사 인물들의 묘를 기행하며 느낀 점은 자식의 벼슬이 부모보다 높았다면 역장도 했다는 점이다. 후손된 입장에서 보면 벼슬이 높은 분이 더 귀하고 존경스런 조상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장을 할 경우 조상에 대해 죄송스럽고 미안한 감정을 드러낸 사례도 있다. 한문학의 대가로 대제학을 지냈던 이정구 선생의 묘는 부모 묘보다 위쪽에 있다. 안내판에는 “순차적으로 묘를 쓰면 후손 중에 역적이 나올 묘 터라 하여 할 수 없이 역장을 했다”고 적혀 있다. 역장은 절대 금기시해야 할 장례 풍습이 아닌 듯하다.

조제희  < 대동풍수지리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