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수업 ´죽음의 의미´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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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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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오해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들 증명은 어쩌면 비과학적으로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사학의 창시자 퀴블러-로스(E. Kübler-Ross)가 말했듯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종교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사실의 문제이다.

사후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앙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가 아닌, 죽음 이후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하여 제대로 알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 하는 사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 네 가지 증명을 살펴 보도록 한다.

첫째,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증명이다. 이들에 따르면 임종을 2-3일 앞둔 환자는 대화하던 도중에도 갑자기 허공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누가 와 있다”, “누구를 보았다”고 말한다고 한다. “문밖에 누가 있으니까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퀴블러-로스 박사의 아버지 경우를 예로 들 수도 있다. 박사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와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말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전신마비 상태로 중증장애인 수용시설에 있었는데, 가족들이 문병을 가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 곳에서 쓸쓸히 죽었는데,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그 일을 참회하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둘째, 임사체험자들의 증명이다. 임사체험(near-death-experiences)은 임상적으로 죽음판정을 받았다가 얼마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되살아난 사람이 그 사이에 겪은 경험을 말한다. 이들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한 공통점들이 있다.

◇육신으로부터 영혼(심식)이 벗어나 자신의 육신을 허공에서 내려다본다. 이들의 의식은 생생하게 깨어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단지 육신과 영혼(심식)이 분리되는 것임을 경험한다. 살아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아무런 고통도 없는 평온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칠흑같은 어두운 터널같은 곳을 통과하는 듯 캄캄한 어둠 속을 지나 삶과는 다른 현실, 다른 세계를 만난다. 이른 바 ‘저승’이라는 세계로서 살아있을 때에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던 다른 세상이다.

◇빛의 존재를 만난다. 사랑으로 감싸는 빛의 존재와 함께 있으면서 온몸으로 축복을 가득 느낀다.

◇파노라마처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빛의 존재와 함께 자신의 일생동안 겪었던 다양한 일들을 영상 이미지를 통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되돌아본다.

◇돌연 어떤 장벽이나 경계선 같은 것에 도달한다. 몇몇은 먼저 죽은 친척이나 친구와 만나기도 한다. 여기서 임사체험자들은 가족을 돌보기 위해,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 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또는 사명감이나 봉사정신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육신과 이승의 삶으로 되돌아와 복귀한다.

◇임사체험을 겪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되살아난 이들은 이전의 삶과는 크게 다르게 삶을 영위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다. 관대해지고 자비심을 증장시키며 영혼과 영성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다.

셋째, 빙의현상을 통한 증명이다. ‘빙의(憑依)’라는 것은 영혼(심식)이 사람에게 침투하여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향을 끼치는 상태를 말한다. 육신을 잃은 영혼(심식)이 갈 곳을 찾지 못 하고 떠돌다가 머물기에 적당한 사람이나 장소를 만나면 깃들게 된다.

사람에 깃들면 그 사람은 그 영혼(심식)에 홀린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된다. 장소에 깃들면 그 장소는 흉물스런 소문을 내게 된다. 탤런트 김수미 씨의 빙의현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신의 차에 치여 숨진 시어머니의 영혼(심식)이 며느리 김수미 씨에게 빙의되었던 사례였다.

빙의현상은 아직도 과학적으로 수용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의 빙의주장을 망상이나 환각으로 판단하여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조울증의 진단을 내리고 약물치료만 할 뿐이다.

넷째, 티베트의 바르도의 증명이다. ‘바르도(bardo)’는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에 나오는 개념으로서 사유(死有)와 생유(生有)의 사이에 존재하는 중유(中有, 中陰身)을 말한다. ‘bar’는 ‘사이’를 뜻하고, ‘do’는 ‘매달린’ 또는 ‘던져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바르도란 삶과 죽음 사이에 매달려 있는 과정적 존재를 지칭한다.

바르도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들을 보면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일상적 바르도’이다. 현생의 삶이며, 태어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본유로서, 넓은 의미에서 생유와 사유의 중간존재라 하여 바르도라 보는 것이다.

◇‘죽어가는 과정의 바르도’이다. 죽어가는 과정이 시작된 직후부터 내적인 호흡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죽음의 순간에 ‘근원적 광명’이라 불리는 마음의 본성이 떠오르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밝게 빛나는 바르도’이다. ‘다르마타(dharmata)’로 불리는 것인데, 마음의 본성이 밝게 빛을 내기 시작하는 죽음 이후의 모든 경험을 포함한다. 이 바르도는 소리와 색채와 빛깔을 지닌다.

◇‘업에 따라 다시 생성되는 바르도’이다. 우리가 환생하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바르도이다. 일반적으로 좁은 의미로 부르는 중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같이 바르도 개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생의 삶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는 부분까지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이 네 가지 바르도의 개념을 통해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고 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을 자연스럽게, 또 의당 통과해야 하는 하나의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글/박희택 (사)불교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