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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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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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늘도 그저 어제 같다. 내일도 아마 어제 같을 게다. 일상, 이라고 우리는 그런 지루함을 칭한다. 5월 20일 오전 9시. 그 시간에 나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별은 그런 일상을 부셔버린다. 완벽한 이별일수록 그렇다. 보연이가 죽었다. 이제 보연이와 100% 이별이다.

이별은 예상하고 상상하고 고민했던 것보다 실상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시끌벅적하지 않다. 마지막을 기다리는 순간에는 매번 상상할 수 없는 폭풍과 태풍이 지나가지만, 정작 그 마지막의 정점은 고요하기까지 하다. 덤덤하게 그 순간을 맞아야겠다는 그런 결의조차 무심하게 만들 정도로 마지막의 그 순간은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을 정도로 떠밀리듯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만다. 만약, 만약, 그러니까 만약, 당신의 이별이 요란하다면,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영영 다시는 만나지 않더라도 여전히 어디엔가 그 인연이 아직 남아있는지 모른다. 진짜 끝은, 정말 끝나버리는 것이니까, 덤덤할 뿐이다.

동시에 이별은 언제나 낯설다. 도대체 기억되지가 않는다. 겪어지지가 않는다. 기억되고 겪었다면 이토록 매번 새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 이별은 매번 새롭다. 이별이라는 게 항상 새로운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별에 익숙해지는 것은 관두고 눈물이나 안 났으면 좋겠다. 가슴이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반성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다, 이별은 반성을 동반한다. 조금 더 잘 할 것을. 돌이켜 봤자 그때 그게 최선이었고 적당했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아리다. 고맙다는 말을 진작 할 것을, 어째 이제 눈물로 흘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또 아쉽다.

이별은 싫다, 낯설다, 슬프다, 아쉽다, 힘겹다, 새롭다, 경험할 수 없다, 익숙할 수 없다, 닥친다, 대비할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 무기력하다, 눈물 난다, 반성이다, 고맙다, 덤덤하다. 결론적으로 이별은 아프다.
2.생애 마지막 순간, 이라는 말은 흔한 과장법이기 때문에 그 말을 곱십어 볼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 말을 새기면 참 슬프다. 왜냐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어떤 순간이지만 우리는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생애 마지막 순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살아있다면 생애 마지막 순간 따위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흔한 과장법이다.

그런데 이제 녀석과 기억은 모두가 생애 마지막 순간이어 버린다. 그저 흔해 빠진 과장법인데 이렇게 아플 수가, 젠장.

녀석과 내가 생애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서로 수술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우연찮게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병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그래서 서로 마지막 대화는 안부일 수밖에 없었다. 내 수술이 먼저였고 내가 깨어날 때쯤 녀석은 수술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서로 휴대폰 문자를 주고받았고, 간단한 이야기도 나눴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 처음으로 본 문자가 녀석의 문자였고 답한 문자가 녀석의 문자였다는 걸, 그러니까 그게 녀석과 내 생애 마지막 순간일 것이라고 녀석이든 나든 알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까? 어쩌면 녀석과 대화할 수 있는 내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설령 내 차례가 오지 못할 만큼 녀석과 인연이 깊지 않았더라도 그 어느 시점은 마지막 대화였을 것이고, 역시 우리는 그 대화가 마지막이라는 걸 알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생애 마지막 순간이라는 표현은 이제 나에게는 경험적으로 와 닿는 과장법이다.

그리고.

나는 한 개비 남은 담배를 피운다. 녀석이 혼수상태였을 때 회사에 놓아둔 짐을 한번 정리하면서 챙겨놓은 담배이다. 짜증나게도 한 개비만 남아있었다. 한 개비 남은 담뱃갑을 보며 꽤나 짜증을 냈었다. 아무래도 직업이 그래서인지 떠오르는 건 영화 속의 흔한 장면들이었다. 이게 영화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분명 어떤 암시를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겠거니 싶어서 짜증이 났었다. 그렇게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겨둔, 그리고 다시 내가 남겨둔 그 마지막 한 개비를 피웠다. 특별하게 피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감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덤덤할 뿐이었다.
3.친구가 죽었다. 죽었다는 말을 치환할 수 있는 수많은 표현이 있지만 어떤 말도 찾지 못했다. 처음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내가 팀원들에게 팀장들에게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때 나는 매번 망설였지만 결국 더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또 상대에 따라 적당한 호칭을 붙여서 무슨 팀장, 무슨 기자, 이렇게 불렀지만, 나에게는 ‘친구가 죽었다’는 다른 표현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에게 일관되게 그 친구의 직장상사지만, 나에게만은 나는 그의 친구이다.

사실 직장 동료들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봐왔던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보게 된다. 한번 곰곰이 계산해보라. 당신의 식구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보게 된다. 나는 그래서 그 친구의 전직장 동료들을 더 존중한다. 나보다 더 많이 울어도 괜찮은 사람들 안에 그들은 포함된다. 그래서 전직장 동료인 듯한 분이 운구를 같이 할 수 있겠냐는 말에 내 자리를 양보했다. 나는 양보한 게다. 나보다 인연이 없는 다른 팀장을 뺄 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양보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내가 그들보다 더 많이 울어서는 안 된다고 화장터에서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장례식 내내 그런 생각이 줄곧 떠나질 않았다. 입관하기 전 마지막으로 유골함을 안아주라는 그 친구의 부모님 말씀에도 멀뚱멀뚱 쳐다만 봤던 것은, 친구의 어머님보다 아버님보다 동생보다 더 울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더 울면 안 된다는 기묘한 강박 때문이었다.

내가 더 울어도 된다고 증명해줄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 내 강박은 내 짐작으로만 해결될 뿐이다. 친구의 장례에 내게는 낯선 사람들을 그 강박으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울지, 저렇게 울만큼 친한가, 그냥 눈물이 많아서 저런 건 아닌가, 알고 보면 서로 안 친했던 게 아닐까, 나중에 너한테 물어봐야지 라고 나는 한참을 어이없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지를 깨닫자 울음이 차올랐다.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죽어가는 90년대 홍콩영화들을 보고 기억하고 좋아하건데 진짜 친구가 죽는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내가 경험한 친구가 죽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이다.
4.“꿈에 나타났어.” 충격적인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 인연과 징후를 만들어내고 그것들로 이해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비이성적인 상황을 이성적이라고 이해하려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갑자기 꿈에 나타났다느니 느닷없이 물건이 깨졌다느니 그런 말들을 한다.

내게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1주일 전 꿈에 나타나 불안한 나머지 다른 팀장을 시켜 너의 어머님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때가 아마 혈압이 낮아지기 시작했던 때라지. 장례 마지막 날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네가 우리 회사에 오기 전에 수년을 다녔던 그 회사를 발견했다. 극장 다니며 수시로 다녔던 길인데도 여태 몰랐었는데. 또 너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네 이름이 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 사연에 등장한 아이의 이름이 보연이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였다면 나는 너와 인연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게다. 그리고 확신하는데 나보다 더한 인연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게다. 너의 장례식장은 8호실, 그리고 바로 옆이었던 9호실의 상주가 김형호였다. 내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누군가들에게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구는 무섭다고 했고 누군가는 신기하다고 했지만 내가 그 이야기를 전한 것은 증명하고 싶을 뿐이었다.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꿈 이야기라든가 흔한 이름이라 알고 보면 라디오에서 하루걸러 나오는 이름이라든가 그렇게 이성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인연이 아니라 진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연을.
5.“실장님도 우리 보연이 기억해주세요.” 장지에서 헤어질 때 녀석의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예, 라고 쉽게 대답했지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기억이 쌓일 텐데. 그리고 이 글이 내 생애 마지막으로 보연이에 대한 글일 지도 모르는데. 이제 이 순간이 지나면 나는 조금 더 덤덤해지고 조금 덜 울고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너와 인연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어느 특정한 찰라가 뇌에 기쓰를 내버리면 그 찰라가 기억날 때마다 더 생생하게 그 때로 되돌려진다. 하지만 그 기억이 생생한 지는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기억은 시간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시간은 기억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