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에 대해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8:23

본문

인간이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완전한 파괴이며, 끝을 의미한다.

그러나 죽음은 직접 경험해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요, 무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한다,
요즈음 신문을 통해서 자살에 대한 슬픈 기사를 가끔씩 접한다. 그 중에는 심심찮게 사회적인 선망 대상이 되는 유명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그리고 인기 연예인들의 이름도 끼어있다. 모두 생활비관 자살들이라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느냐”가 말해 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의 삶이었고 한국 안중근 의사의 죽음은 안중근 의사의 삶이었다.

삶과 죽음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의문은 역설적으로 삶이 무엇인가로 풀어야 한다. “죽으면 살리라”하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사람의 목숨은 한 호흡 간에 있다”라는 부처의 가르침은 크게 다름이 없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가 아니라 삶의 숨결이라는 말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관계 속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관계와 이에 따른 반응을 보면 알게 된다. 경제적 생활에 대한 갈등으로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가장 큰 관계가 돈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체크북과 크레딧 카드가 이야기 해 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 없는 불행은 대부분 물질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된다.

예수의 위대한 삶은 광야에서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외침으로부터 시작됐다. 예수는 물질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부는 편리한 면에서 가난보다 낫다”라는 단서를 달지 않았다.

예수는 물질에 대한 탐욕의 한계를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주기도문 속에서 이야기했다. “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닌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 이상의 부”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탐욕이라는 말이다.

“광야에 이름도 없이 피어나는 들꽃들과 하늘을 날으는 새들을 보라” 하면서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가르침은 미래를 포기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현재를 사는 삶 속에 천국이 있다는 말이다.

아무런 목적이 없이 피었다가 지는 한 송이 꽃을 생각 없이 바라보라. 여름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를 열어보라. 아름다운 침묵으로 마음이 흠뻑 젖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관계이고 행복한 삶이다.

그리고 때때로 이웃을 위해서 이유 없는 도움을 주고, 이유 없이 웃어 보아라. 꽃향기처럼 존재해 보아라.

아무런 욕심이나 의도가 없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존재는 축복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