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소멸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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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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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모든 것의 끝남을 의미하는 소멸이 결코 아니다. 죽음이 소멸이라면 이 지상은 텅 비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지상이 텅 비지 않는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채워지기 때문인데, 죽음은 바로 새로운 생명을 채우는 새로운 시작으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휘트먼(W. Whitman)의 시 ´풀잎´의 마지막 부분을 애송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들은 어딘가에 살아 잘 지내고 있을 터이고,
아무리 작은 싹이라도 그것은 진정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표시해 주고 있으니,
만일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삶을 추진하는 것이지,
종점에서 기다렸다가 삶을 붙잡는 것은 아니다.
만물은 전진하고 밖으로 나갈 뿐 죽는 것은 없고,
죽음은 사람들의 상상과는 달리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태어난다. 이 때 유의할 점은 자기동일적 ‘자아(自我)’가 있어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겉의 옷만 갈아입으면서 ‘윤회(輪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뢰야식적 업장의 결과[‘無我’]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아와 무아와 윤회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이치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매우 주요한 초점을 찾을 수 있다. 죽음이 소멸이라는 의식은 자아를 전제로 한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라는 자아 - 고정된 실체를 전제로 하여 죽으면 바로 이 ‘나’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자아를 영원한 존재로 착각한 점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하며, 그 근거는 불교의 무아사상과 공사상(空思想)이다.

자아가 아닌 무아의 ‘나’가 죽는 것이며, 이러한 ‘나’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텅빈 충만으로서의 ‘공(空)’으로의 회귀이고, 이 공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사람은 공에서 와서 공으로 돌아가며, 다시 공에서 출발하여 공으로 간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현재의 ‘나’라고 하여 소멸의식을 불러일으킬 자아일 수는 없다. 이것이 윤회의 실상이다.

존재의 윤회는 육도(六道)를 전생(轉生)하며, 업에 따라 사생(四生)의 형태로 나누어진다. 육도란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세계를 말한다. 앞의 삼도를 삼악도라 하고, 뒤의 삼도를 삼선도라 한다. 사생이란 태생(胎生·태에서 태어남·사람과 짐승 등), 난생(卵生·알에서 태어남·조류 등), 습생(濕生·습기에서 태어남·벌레 등), 화생(化生·업력에 의해 화하여 태어남·중유 등)을 지칭한다.

화생을 말하는 중유는 사유(四有)의 하나이다. 사유란 사람의 삶과 죽음의 단계를 총칭해서 말하는 것으로서, <생유(生有) → 본유(本有) → 사유(死有) → 중유(中有)>가 그것이다. 중유는 업에 따라 다른 생유 단계로 윤회 전생한다. 생유는 삶을 받는 탁태(託胎)와 결생(結生)의 단계이며, 본유는 삶을 받은 뒤 죽을 때까지의 단계이고, 사유는 임종의 단계이며, 중유는 죽음 뒤 다음 삶을 받을 때까지의 단계이다. 이 중 중유는 49일 간이며, 불교의 49재는 업을 소멸하고 보다 해탈된 다른 생유의 삶을 받기를 기원하는 자손의 불공이다.

그렇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사유와 중유를 거쳐 다른 생유를 받는 새로운 시작이다.

글/박희택 (사)불교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