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삼릉-예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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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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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西三陵)은 원래 도성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 즉,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을 말한다. 서삼릉은 한북정맥 바로 곁에 놓여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북한산을 거친 다음 고양시에 들어와서는 한북정맥이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대를 지나는데 서삼릉 초입에서 서쪽 방향으로 길게 나아간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정맥 자체에 명당 맥이 지난다고 믿었는지 큰 산도 아닌 이곳에 왕릉과 왕실의 묘를 여러기 조성했다.

서삼릉의 시작은 본디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에서 시작됐다. 이후 중종의 정릉(靖陵)이 자리를 잡았다가 강남구 삼성동의 선·정릉으로 옮겨갔고 그 아들인 인종의 효릉이 조성됐다. 또 왕릉 주변에 왕실의 묘지가 대규모로 만들어지는데 명종~ 숙종 이후 조선 말기까지 역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의 묘 등 수십 기의 무덤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철종의 예릉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서삼릉이 완성된다.
 
# 예릉에서 철종의 서글픈 삶을 만나다

예릉의 주인은 조선 25대 철종(1831~1863)과 철인왕후 김씨(1837~1878)이다. 철종이라는 공식적인 이름보다 '강화도령'으로 더 잘 알려진 주인공 원범은 그 생애가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짧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그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이었고, 은언군은 그 아들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여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또 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고 죽음을 당하고 은언군 또한 강화도에서 사사됐다. 또한 철종의 형도 모반 사건에 연루돼 사사되고 나머지 가족들도 강화도로 유배를 가는데 그때 철종의 나이는 14세였다.
 
이렇게 몰락한 왕족내지는 양반, 아니 평민으로라도 강화도에서 계속 살았다면 철종 그 자신은 조금 더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19세 때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내 왕통을 물려받았고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에 눌려 왕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린다.
 
철종이 14년 동안 재위했다고는 하나 삼정이 문란한 가운데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고, 이단시하던 천주교가 널리 퍼지면서 국교가 흔들렸으며, 그에 대응하기 위한 동학마저 일어난다. 탐관오리와 극심한 민생고로 인해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이를 수습하고자 삼정이정청을 세웠지만 오래된 세도정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결국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를 처형한다. 어떤 명약도 환부가 크고 깊으면 소용이 없듯이 그 자신도 병에 걸려 세상을 뜨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래도 자신이 어려운 세월을 겪었음인지 기근과 한재 및 화재 등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돕기 위해 구황과 구제에 열성을 보인 임금이었다.
 
 아니 세도 정치가들이 임금에게 할당한 업무가 그에만 국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는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임금께서는 구휼에나 신경을 쓰라는 '배려'였을까? 가족도 불운해 아들 넷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고명딸인 영혜옹주도 박영효에게 시집간 지 세 달 후에 죽고 말았다
 
#예릉의 석물들과 철종의 초상화

예릉은 조선왕조의 상설제도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철종 다음에 왕이 된 고종과 순종은 황제였으므로 황제 능의 법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그 시대를 대변이라도 하려는 듯 머리가 지나치게 큰 가분수요, 몸집도 비대한 것에 비해 키는 작다.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수염과 눈썹의 표현은 과장되었을지언정 세밀한 표현을 했다. 석마의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 공간에 새긴 난초 그림조각도 수준 이하이다. 다만 능을 에워싼 소나무 숲이 그 너머의 초지를 대강 가려주는 것이 고마울 뿐.
 
현재 조선 왕의 어진(초상화)은 극소수가 남아있다. 여러 전란과 화재 및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잃었는데 태조와 영조, 그리고 철종과 고종의 어진 등이 전한다. 그 가운데 철종의 어진은 불에 타서 절반 정도 남았다. 이 그림 자체가 철종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듯하여 보기에 안쓰럽다. 그 시대상 때문인지 얼굴마저도 측은해 보이는데 눈이 사시여서 불안한 상태일 때 그린 것 같은 느낌이다. 화려한 복장에 비해 순진한 표정이 오히려 보는 이를 서글프게 한다. 터럭 한 올까지도 세밀하게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우수성이 하나 더 느껴지는 것은 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힘이 없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칫 왕의 약점이라고도 할 사시를 그대로 그려낸 점이 바로 그것이다.

예릉 옆에는 사도세자의 큰아들이자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의 묘인 의령원이 보인다. 정조가 태어나기도 전 3세로 일생을 마감했지만 한때는 영조와 나라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또 의령원 바로 아래에는 정조의 큰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 효창원을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서 옮겨서 썼다. 역시 5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서 정조를 슬프게 했던 주인공이다. 두 어린이의 묘소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세 칸짜리 재실을 만들었다. 비석엔 비각도 세우지 않아 단출한 모습이다.

서삼릉에는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유적도 놓였다. 각지에 조성했던 왕과 왕자들의 태실을 한곳에 줄지어 모아놓은 곳이다. 우리가 신성시했던 태봉의 태실을 그들은 왜 열었으며 그 안에 들었던 태항아리는 모두 어찌했는가. 이 괴로운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도 이제는 비공개 지역인 효릉과 태실 지역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골프장과 목장에 둘러싸인 서삼릉

서삼릉을 가려면 다소 이국적인 풍경과 만나게 되는데 주변이 한국마사회의 종마장인 목장으로 쓰여서 광활한 초지와 그를 흰색으로 에두른 담장을 만나게 되는 점이다. 그뿐인가. 서삼릉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엔 골프장이 들어섰으니 서삼릉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목장이 희릉과 예릉을 완전히 감싼 모습이어서 마치 두 능을 포위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농협대학마저 목장 곁에 놓였으므로 과연 우리 스스로가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이나 하는지 되묻고 싶어지는 현장이다. 방문객들은 그저 이국적인 목장 풍경에만 카메라를 들이댄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목초지를 바라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싶다. 예전 능역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되는 면적으로 남은 서삼릉! 왕릉과 아무 관련도 없는 시설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보기만해야 할 것인가? 철종의 서글픈 삶이 아직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