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묘칼럼] 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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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23-02-0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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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CSF발전연구원장/박철호(시인. 상담학박사) 

제사는 지역마다, 가문마다, 가정마다 다르다. 일반인에게 나타난 제사의 풍습은 언제부터였을까?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직업의 가치로 생각한 조선은 노비의 나라였다. 그러니 몇몇 가문이 왕이라는 전제 군주를 아바타로 삼아 국가를 통째로 말아먹어도 그자들을 징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만들어진 나라로 초기에는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그들이 차용한 유학의 이념 중에 수신, 재가를 한 사람만이 치국, 평천하를 할 수 있다는 대전제의 도덕적 잣대가 있었다. 공자가 제창한 그 좋은 유학 이념이 조선 중후반을 지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초상을 두 번 치르면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도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폐단이 생겼다. 더 놀라운 것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유학 지도이념이라고 철저하게 설파하던 대 유학자일수록 노비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취하고 대 농토를 경영하였다. 그들은 권문세가를 형성하고 권문 세도를 부리며 조상 타령, 권력 타령, 제사 타령을 했다. 그리고는 서원이라는 이상한 제도를 만들었다. 

 

서원은 좋은 점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엄청난 병폐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심각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다. 유학자를 자처한 그들은 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학문를 하고 시회(詩會)를 했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는 백성들을 개돼지로 삼았다. 그러니 그들이 떠들던 이야기는 탁상공론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권력의 앞잡이로 변신하여 백성을 때려잡는 백정 짓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예의와 예절을 담은 절차인 사례(四禮)는 그들을 굳건하게 지키는 도구로 전락했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등장한 사례편람(四禮便覽)은 유학자들과 권세가들의 놀이 문화에 불과했다면 과한 소리일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사례라는 예법은 놀이 문화에 불과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례 중에서도 제례를 통해 나타나는 불천위(不遷位) 제사는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해괴한 문화를 만들었다. 제사 지낼 자손이 없어질 때까지 지내는 이 불천위 제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모든 사람을 타락한 양반 놀음에 취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유학은 숙종임금을 지내면서 문화 르네상스기를 맞이한다. 부의 축적은 사농공상의 기반을 흔들어 하류층도 서서히 상류층의 문화를 향유하는 풍조를 조성하였다. 족보가 양반의 표시가 되자 천민, 쌍놈이라고 불리던 하층 계급들이 돈을 모아 족보를 사고 고향을 바꾸어 신흥 양반층으로 둔갑한다. 그 일을 부채질한 것이 옥사이고 민란이었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게 되자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상류층으로 진입하는 방법이 보였다. 그러니 돈으로 족보를 사서 양반 자랑, 돈 자랑, 가문 자랑으로 성대히 초상을 치르고 성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보편화하였다. 그러다 보니 삼년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쌍놈이 되고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면 불효자가 되었다. 이런 망국의 허상이 세도가의 장난으로 정치술이 되고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러니 허상만 따르는 개, 돼지들까지도 체면과 놀이 문화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그들에게 천주교 전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니 조상 신주를 불태운 사람은 대역 죄인이 되고 제사를 거부한 사람은 목이 날아갔다. 그런데 2023년 설 명절을 지나면서 특이한 뉴스가 나왔다. 600년 조선 전통의 예법의 산실인 성균관에서 제사에 대해 영상물을 만들고 재해석을 내놓았다. 제사는 간소화해야 하고 전을 올리지 않아도 지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늦어도 한참 늦은 훈수를 의견이라고 제시하였다. 제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내왔다. 그런데 새삼스러운 일처럼 제시한다는 것에 필자는 많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뒤죽박죽된 세상 속에서도 장례와 제례는 여전히 성대히 지켜져 왔다

 

김가는 어릴 적 큰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은 기억이 있었다. 민란 때 부모와 가족 모두 잃고 10살부터 보부상을 따라다녔다. 일자무식인 그의 지게에는 주발 2개와 소금 종지, 조그만 지첩(紙牒)이 들어있는 보자기가 달려 있었다. 지게를 만들어 지워준 털보 아저씨가 15살이 되면 어디에 있든지, 매년 10월 보름날 마을 우물가에서 쌀밥을 지어 주발에 담고 물 한 그릇과 소금 몇 알을 담아 아버지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지첩은 장가를 들면 그 고을 원님에게 보여 주라고 했다. 김가는 갯가에서 소금을 받아 산동네로 가서 곡식으로 바꾸고 그 곡식을 팔아 돈을 만들었다. 돈이 생기자 어느 고을에 땅을 사고 소작을 놓았다. 그러기를 20여 년을 했다. 단골로 다니던 주막집 주모 도움으로 처자를 얻고 땅을 꽤 장만한 그 고을에 정착했다. 김가는 그 고을 원님을 찾아가 지첩을 보여 주었다. 깜짝 놀란 원님이 복권된 김 아무개 참판네 손자라고 했다. 졸지에 양반이 된 김가는 아들 셋을 낳았다. 일가를 찾았더니 그 당시 대단한 권세가가 자기의 일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김가는 약초를 수집해서 파는 일을 계속했다. 큰아들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지첩의 능력으로 아들 하나는 능지기가 되고 참봉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큰아들에게서 난 손자가 그 고을 호장이 되었다. 섣달그믐께가 되면 호장 댁에서 큰댁으로 머슴 세 명이 온종일 엽전을 날랐다. 엽전 창고에 엽전 똥이 몇 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장네 제사상이 상상을 초월했다. 김가의 유언으로 우물가에서 지내던 제사 방식 그대로였다.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 소금 두세 알, 그렇게 제사를 지내도 김가네가 사는 고을로 들어가려면 김가네 땅을 밟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제사는 자손의 기억이다. 부모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이 휘어진 제사상보다 훨씬 나은 일일 것이다. 지금의 2~30대에게 제사상은 무슨 의미일까? 

한국CSF발전연구원장/박철호(시인. 상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