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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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6-07-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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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송현. 시인. 송현 행복대학교 대표. 칼럼니스트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이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서 명상을 한다. 그딴 짓거리는 붓다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흉내를 내는 헤프닝에 가깝다고할 수있다. 어리석은 수행자들이 벽을 쳐다보고 앉아서 명상을 한다. 그딴 짓거리는 달마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흉내를 내는 헤프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하건데 보리수 나무 아래 전 생애를 앉아 있는다고 해서 붓다가 되는 것이 아니고, 면벽 수행을 일생동안 한다고 해서 달마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함량미달 수행자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 많지 싶다.
 
그대가 보리수를 심고 그 밑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어보라. 그대가 붓되가 되는지 말이다. 결코 그대는붓다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어리석은 또라이 짓거리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의식들이 함량미달과 바보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붓다가 무작정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는 수백만 생을 살아오면서 붓다가 되기 위한 오랜 시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앚아 있었던 것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노력과 탐구행위가 들어 있고 그것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던 것이이다. 다시 말하면 붓다가 보리수 나무 밑에 오기 전에 이미 물은 99.9도까지 끓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99.9도까지 끓일 생각은 하지 않고 보리수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눈만 감으면 되는 줄 안다. 보리수 나무는 물을 끓이는 난로도 아니고 불을 붙이는 풍로도 아니다. 그냥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인 나무 일뿐이다! 보리수 나무에게는 물을 끓이는 어떤 기능도 없다! 그러니 99.9도 까지는 딴 곳에서 끓여와야 한다. 가령, 99.9도까지 끓여온 수행자라면 보리수 나무 밑이 아니라 개똥쥐바퀴 나무 아래 앉아도 깨달을 것이고, 흔해빠진 버드나무나 살구 나무 아래 앉아도 깨달을 것이다.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은 붓다가 보리수 아래 앉아 있었던 것은 그저 우연한 사건이었을 뿐이란 사실이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지 않았을지라도 다른 방법으로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깨어 있음이다. 그의 피나는 고행으로 한 만반의 준비와 그의 오랜 기다람이다. 그러니 보리수가 문제가 아니다. 보리수 아니라 아무 돌맹이 위에 앉았더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붓다가 그 시간에 맨발로 길을 걸어갔더라도 그 일은 일어날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과 함량미달의 수행자들은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데 아무런 원인도 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원인이라면 그대는 따라 할 수 있다. 붓다보다 더 완벽한 자세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으면 그대도 깨달을 것이다. 
 
물을 99.9도까지 끓일 생각은 하지 않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 가부좌를 트는 짓은 바보같은 또라이짓이다. 깨달음은 어떤 행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의식을 거행하든지 거기에는 깨달음이 없다. 필요한 것은 이해히지 예배나 수행의 의식이 아니다! 그대가 붓다의 앉은 자세를 따른다면 그것은 정말로 넌센스이다. 
 
어떤 마을에 할아버지가 죽었다. 장례식 준비를 하느라고 집안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마당에는 천만을 치고 멍석을 여러 장 깔고, 상을 내다 놓는다. 그리고 마당 한 구석에는 가마솥을 내걸고 물을 끓이고, 돼지를 잡고 야단법석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 집에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 많이 몰려오고 북새통을 이루는 것을 보고 개도 놀라고 당황하여 집안 여기 저기를 설레발이치면서 돌아다녔다. 죽은 할아버지의 아들이 당황한 개가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개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마당 맨 구석에 있는 나무 아래 묶어두었다. 그러자 개는 진정이 되었는지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았다. 장례식을 무사히 치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죽은 할아버지의 어린 손자가 있었다. 손자는 자기 아버지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마당에 돌아다니는 개를 잡아서 마당 구석 나무 아래 묶어두는 전과정을 똑똑히 보았다. 이 손자가 자랐다. 어느 날 손자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래서 장례식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때 손자는 옛날에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아버지가 개를 잡아서 마당 한구석에 있는 나무에 묶는 광경이 떠올랐다. 손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장례식을 할 때는 제일 먼저 개를 나무에 묶어야 하는 거야! 
 
그때 그 집에는 개가 없었다. 그래서 손자는 마을에 나가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가까스로 남의 개를 한마리 잡아와서 자기집 마당 한 구석 전에 아버지가 개를 묶었던 그 나무에 묶고 장례식을 무사히 치루었다.
 
그후 손자가 죽었다. 손자의 아들이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 제일 먼저 마을에 나가서 가까스로 개를 한마리 잡아다가 자기 아버지가 묶었던 그 나무에 개를 묶고 장례를 치렀다. 그후 그 집안에서는 장례식을 할 때는 반드시 개를 잡아다가 마당 구석 나무에 묶어두는 것이 중요한 의식이 되었고 그것이 그 간문의 아주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대부분 의식이란 앞서 개를 묶는 것처럼 어리석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해나 달이나 나무나 돌 따위를 보고 하염없이 절을 해대는 짓이다.이는 장례식을 치르기 전에 반드시 개를 잡아와서 정성껏 나무에 묶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또라이짓이다! 이는 마치 붓다가 오랜 기간동안 물을 99.9도 끓인 것은 보지 못하고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만 보고 덩달아 보리수 나무에 앉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대는 개를 묶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개 한마리가 아니라 열마리를 묶어도 소용없고, 개 아니라 소를 묶어도 소용이 없고, 물론 코끼를 묶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딴 또라이짓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그대는 개를 묶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뒤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깨달음을 기다리면서 마냥 붓다를 흉내를 내는 모든 수행자들과 하염없이 탑을 돌고 몸에 무리가 올 정도로 절을 해대는 것은 단지 바보짓일 뿐이다. 그대가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한다면 깨달음에 이르는 왕도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보리수나무를 찾을 생각일랑 하지 말고, 개를 묶는 또라이짓도 하지 말고 오직 물을 99.9도 끓이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