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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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6-01-1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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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했으며, 효종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극심해졌다. 예송은 예학에서의 시비를 가리는 것을 말한다. 예학은 유교적 관혼상제의 의례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예송은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논쟁으로 발전했다. 1차 예송은 효종이 죽은 뒤 계모인 자의 대비가 효종의 상(喪)을 당해 상복을 3년 동안 입을 것인지, 1년 동안 입을 것인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2차 예송에서는 자의 대비가 며느리인 효종비의 상을 당해 상복을 1년 동안 입을 것인지, 9개월 동안 입을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허목 등 남인은 왕실의 예는 사대부의 예와 다르다고 주장했고, 송시열 등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와 같이 “주자가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 허목(남인, 1595~1682) : 효종 임금께서는 둘째 아들이시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자의)대비께서는 왕에 대한 예우에 따라 3년간 상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 송시열(서인, 1607~1689) : 효종께서는 둘째이시므로 [임금도] 사대부의 법도에 따라 대비께서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이에 따라 남인은 1차 예송에서 3년 설, 2차 예송에서 1년 설을 주장했으며, 서인은 각각 1년 설, 9개월 설을 주장했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했지만,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다.
 
예송은 서인과 남인의 학문적 논쟁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붕당 간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어 갔다.
 
양 난 이후 조선 사회에는 신분 질서가 동요하고 상공업이 발달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정통과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은 변화에 맞서는 보수적 학문이 되어 절대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지배층은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에 집착하여,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이나 학문을 배척하였다. 성리학의 발전은 불교, 양명학 등을 배척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명분론을 강화하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화했다.
 
반면, 17세기 후반부터 주자 중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6경과 제자 백가 등에서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인물로 윤휴와 박세당을 꼽을 수 있다. 윤휴는 유교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했고, 박세당은 실천을 강조하는 양명학과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반주자학적인 유학 사상을 전개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에 서인의 중심에서 있었던 송시열은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성리학 사상을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기도 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고려와 비교하면 신분 간 이동의 폭이 넓었다. 상민은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했다. 조선 중기 까지는 집안의 대를 잇는 자식에게 5분의 1의 상속분을 더 준다는 것 외에는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 자식들은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책임을 분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이 보급되면서 성리학적 예속이 점차 확산되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성리학적 가족 질서가 정착되어 전통적인 가족 제도가 무너지고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강화되었다. 혼인 후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생활하지 않고 곧바로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친영 제도가 정착되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여도 제사도 형제와 자매가 돌아가면서 지내고 아들이 없으면 외손자가 모시기도 하였으나, 17세기 이후 제사는 반드시 큰아들이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고, 재산 상속에서도 큰아들이 우대를 받았다. 성리학이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하 관계 중시하는 명분론이 강조되고 삼강오륜이 기본 덕목으로 제시되었다. 삼강오륜은 현실적으로 가부장적 종법 질서로 구현되어 성리학 중심의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데 이바지하였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부계 위주의 족보를 편찬했으며, 같은 성끼리 모여 사는 동성 마을이 만들어졌다. 예학과 족보를 통해 혈통 관계를 정립하려는 보학이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양반은 유교 윤리의 확산을 위해 도덕과 의례의 기본 서적인 “소학”을 보급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모시는 가묘를 세웠다. 족보를 편찬하여 안으로 집안의 결속을 다지고,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였다. 개인은 종중이라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16세기에는 부국강병을 반대하고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의식을 반영하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 양반이 지배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양반의 취향이나 가치관이 반영된 문화가 나타난 것이다.
 
향촌 선비들의 활약으로 문학 활동이 지방까지 확산되어 학습 교재인 “훈몽자회”가 편찬되었다. 국어에 대한 연구도 진전되었다. 어휘 수집에 관한 것으로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이의봉의 “고금석림” 등이 있다.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 문학이 주류가 되어 한시, 가사, 시조 분야에서 뛰어난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김시습은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어 민중의 생활 감정과 역사 비판 의식을 담았다. 이 소설은 유교에 바탕을 두면서도 불교와 도교적 사상을 담은 것이다.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에서 우리 고유의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의식을 묘사하였다. 관료와 사림을 비판한 방외인 문학이 나타났다. 15세기 말 김시습으로부터 시작된 방외인 문학은 16세기 들어와 임제, 어숙권 등이 활약하면서 사회 비판적 성격이 더욱 커졌다.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온 시조는 16세기에 들어 황진이, 윤선도 등이 활약하면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드러낸 작품이 많이 나왔다. 윤선도는 오우가와 어부사시사를 통해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여유로움을 표현했다.
 
조선에서 새롭게 발전한 가사 문학에서는 송순, 정철 등이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가사를 지어 국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 또한 황진이, 허난설헌 등 여류 작가들도 배출되었다.
 
15세기에는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궁궐, 관아, 성곽, 학교 등을 중심으로 건축이 발달했다. 16세기에는 사림 세력의 주도로 서원 건축이 활발해졌다. 서원은 교육 공간인 강당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기숙사인 재(齋)를 배치하였다. 또한 선현의 위패 모신 사당을 지었다. 사찰의 가람 배치 양식과 주택 양식이 실용적으로 결합된 서원 건축에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양반의 정서가 잘 반영되었다. 주위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경주의 옥산 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