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풍수가의 묏자리(명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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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5-11-05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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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4월 유병돈 전 부여군수 일행은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목단 축제에 참석하고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 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망산 청선리(봉화대)에서 반혼제를 올렸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부여 능산리 고분군 경역 내에 상징적으로 설치된 의자왕(義慈王) 및 부여융(扶餘隆) 설단 조성에 필요한 정갈한 흙 10㎏ 정도를 중국 뤄양 북망산 봉황대 현지에서 채취했다.

북망산(北邙山)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드넓은 구릉지대 백제 유민들의 흔적은 예식진 묘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각처에서 발굴된 묘지명 등을 통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밝혀진 묘지명에는 부여융(扶餘隆) 묘지를 비롯해 흑치상지(黑齒常之) 묘지와 그의 아들 흑치준 (黑齒俊) 묘지 등 일부에 불과하다.

백제유민들에 대한 탐색은 이미 알려진 묘지명에 대한 연구와 함께 역사자료를 통한 탐색 및 학계와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백제 의자왕 묘지탐색 등 몇 가지로 구분된다.

당 고종은 의자왕이 죽은 뒤 조서를 내려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왕인 손호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왕인 진숙보의 묘 옆에 장사하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즉 뤄양 북망산에 묻힌 것이다. 학계에서는 의자왕의 묘가 바로 지금의 봉황대 일대에 존재할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300여년이 흐른 오늘날 의자왕의 묘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부여군은 지난 2000년 의자왕과 부여융 부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가묘와 제단을 설치했다. 특히 뤄양시로부터 기증받은 부여융 묘지석 복제품도 함께 안치했다. 부여읍 능산리 고분군 안에 설치된 가묘에는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 지석을 탁본해 실제 크기로 만들어 안치했다.

내가 그렇게 명망(名望)있는 풍수가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金在敎)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제9대 조계종 종정이신 월하 큰스님의 사촌이신 윤원중(尹元重)선생으로부터 풍수와 역법을 배워서 50여 년을 명당을 찾아 다녔기에 여러 지인들께서 나를 추천해 주셔서 의자왕과 부여융의 설단 배치와 좌향 등 왕릉 조성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영예를 얻어 그 기쁨은 지금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명당의 조건은, 조상의 체백(體魄)을 매장하면 토화(土化) 되어 백골 황골 상태로 천만년 보존되어 땅의 좋은 지기(地氣)와 합이 되면, 다시 어우러져 지기가 나오는데, 이 기류가 후손들에게 감응(感應)과 영감(靈感)을 주고 신묘한 힘을 발휘하게 하여 발복한다는 것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명당의 조건인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지기(地氣)를 가지고 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 이라고 땅속의 기운이 인간사의 모든 걸 좌우 한다는 대중의 믿음이 우리들 주변에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명당의 지기(地氣)가 피어난 것일까?
野山 金永淑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