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이 땅 구원할 임금 태어날 '왕후지지'의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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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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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앞둔 모둠벌초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제주에서는 음력 8월이 되면 조상의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하는 풍습이 있다. 특히 팔월 초하루에 모둠벌초라 하여 친척들이 모여 함께 벌초를 한다. 요즘은 팔월 초하루가 평일인 경우가 많아 초하루 전후의 주말에 모둠벌초를 하는 집안이 늘고 있지만 모둠벌초에는 육지부에 나가 생활하는 후손까지도 반드시 참석을 한다. 심지어 추석에 불참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만 모둠벌초에 빠지는 것은 문제를 삼을 정도다.

그리고는 추석 이전에 모든 조상의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한다. 추석날 당일에 성묘를 하는 육지부와는 다른 제주도의 독특한 풍습이다. 요즘이야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집집마다 차량이 있어 쉽게 묘지까지 갈 수 있지만 예전의 경우는 며칠에 걸쳐 벌초를 하기도 했다. 특히나 한라산 중턱에 묘지가 위치한 경우는 더더욱.

한라산 등산을 하다 보면 간간이 무덤을 볼 수 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라오름분화구 안에도 무덤이 있고, 영실분화구 안에도 무덤이 보인다. 심지어는 예전에 등산로로 이용됐던 백록담 서북벽 직전 장구목 정상부에도 무덤이 있다. 지금은 코스로 바뀌어 보이지 않지만 영실의 구 등산로변에도 여러 기의 묘가 있고, 관음사코스의 개미목 지경에도 묘가 있었다.

등산로와는 별도로 산 중턱에 위치한 많은 오름의 정상부에도 무덤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민대가리동산을 비롯하여 왕관릉, 흙붉은오름, 족은두레왓, 사제비오름 등이다. 국립공원 구역중 약간 저지대에 해당하는 불칸디오름이나 성진이오름, 장오름, 망월악(서흘목악), 삼형제오름, 산근악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 대부분의 묘지는 지금도 후손들이 벌초를 한다. 통제구역이다 보니 사전에 관리사무소에 출입신고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지만.

그렇다면 이처럼 한라산의 높은 고지대의 무덤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와서 묘를 썼을까.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문헌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8월 발간된 '문교의 조선'이라는 책자에 실린 박성근의 제주도 견문기에 의하면 "제주도민은 선조의 분묘를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곳에 모시면 자신이 번창한다고 여겨 해발 5천척 이상이나 되는 한라산록 갈대지대까지 분묘가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보게 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제주도의 각종 전설에 보면 과거 제주 땅은 이 땅을 구원할 임금이 태어날 왕후지지의 명당이었다. 하지만 이를 막으려는 주변 강대국의 방해로 제주의 명당은 파괴된다는 것이 전설의 주요 내용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흔아홉골 전설과 호종단과 관련된 단혈 이야기들이다. 제주도는 원래 백 개의 골짜기가 있어 왕이 나올 땅인데, 중국에서 온 스님이 골짜기 하나를 없애버리자 호랑이와 사자 등 맹수들도 함께 사라지고 그 후로는 왕도 나지 않는 척박한 땅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호종단의 단혈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제주의 6대 명당

그렇다면 제주에는 명당이 없을까. 제주에는 예로부터 6대 명당이 인구에 회자돼 왔다. 양택으로 6개의 명당, 음택으로 6개의 명당이 전해진다. 음택 6대 명당은 첫째, 사라오름을 비롯하여 제2 개미목(개여목), 제3 영실, 제4 도투명, 제5 반득(남원읍 의귀리), 제6 반화(애월읍 지경)이다. 이 중에서 4개의 명당이 한라산국립공원 구역 안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사라오름에는 분화구의 동쪽 안사면에 3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사라오름은 정상에 물이 고이는 화구호로 유명한데, 심지어는 물이 고이는 호수 안에 수중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명당이기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1988년 사라오름에 산불이 발생해 오름 동쪽 능선 넓은 면적이 불에 탈 때도 오름의 바깥 사면에만 피해를 입었을 뿐 무덤이 위치한 안쪽 사면은 온전했었다.

개미목은 관음사코스로 오르다 보면 만나는 지점으로, 동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 사이의 능선을 말한다. 예전에는 등산로변에서 무덤들을 볼 수 있었으나 10여년전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우회하는 바람에 지금은 이들 무덤을 볼 수가 없다. 이곳에 조성된 양씨 묘의 경우 비문을 보면 고종 정묘년(1867)에 생을 마쳐, 장(葬)을 사소장 내 개미목의 동남 방향의 좌(坐)로 자리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비석은 1981년에 애월읍 고성리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확인된다.

이곳 또한 예외 없이 명당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 내용을 보면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쓴 문사랑이란 제주목사의 사령이 있었는데, 힘이 천하장사였다. 나중에 서울에 올라가 말썽을 피우자, 조정에서는 문사랑을 잡기 위해 관아에 일부러 불을 지르고 이를 끄는 사람에게 상을 내린다는 방을 내건다. 이에 문사랑이 뭣도 모르고 여기에 끼어들었다가 잡히는 몸이 되는데, 그 원인을 조사하다 명당자리에 모신 부친의 영향임을 알고 그 무덤을 파헤쳐버렸다는 내용이다.

△ 주희와 마용기의 부친묘 모셔져

영실의 경우는 더더욱 많은 묘가 있고, 관련된 이야기 또한 많이 전해진다. 현재 영실 분화구 안에는 3기의 묘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겨울철 나뭇잎이 떨어진 이후에 보면 등산로에서도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영실 분화구의 동쪽 능선, 그러니까 예전의 등산로에 보면 5기의 묘가 확인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중국 송나라 때의 대학자인 주희의 부친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주씨묘 또는 주씨무덤이라 부르는 곳이다.

영실 분화구 안의 묘 중에는 영조 계사년(1763)에 사망한 이씨의 묘가 있는데, 문과에 합격해 거듭 찰방을 역임하였고 여러 직위를 지내 나중에 2품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비석은 1943년에 건립됐다.

오백장군 서남쪽의 묘는 진씨의 묘인데, 고종 을미년(1895)에 사망한 인물이다. 묘의 위치와 관련하여 한라산 영실 청룡모루 북동방향을 머리로 하였다고 소개되고 있다. 비석은 1945년에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의 유학자인 이응호(李膺鎬)선생이 지은 것으로 돼 있다.

네 번째 명당인 도투명은 돼지머리 형상이라 하여 해두명(亥頭明)이라고도 불리는데, 민대가리 동산을 말한다. 민대가리동산은 어리목코스로 등산을 하다 만세동산 지나 윗세오름 가기 직전 북쪽으로 보이는 오름이다. 현재 이곳에는 5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 중에는 1900년대 전반기 한라산에서의 전설적인 인물인 마용기의 부친 마희문의 묘가 특히 눈길을 끈다.

마희문은 헌종 무신년(1848)에 전라도 강진 비자동 집에서 태어나 의술과 점술, 주역에 능통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무자년(1888) 봄에 정의현감에 임명돼 제주로 들어와 1904년 사망했다. 비석은 1944년에 세워졌는데, 마용기가 표문을 부탁하자 이응호선생이 쓴 것으로 돼 있다. 비문에서는 이 지역을 사소장의 저두전(四所場 猪頭田)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풀이하면 돗머리왓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자리에 부친의 묘를 조성한 마용기는 스님으로 풍수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마용기스님이 조성한 산신기도 터에서 기도를 올리면 자식이 낳았다는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 명당의 주인…효와 덕 쌓아야

조상의 묘를 명당에 써서 발복하려는 심리는 과거의 얘기만은 아니다. 지난 2005년 8월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조난신고가 접수되는데, 50∼60대 등산객 4명이 안개와 빗속에 길을 잃고 실종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대적으로 구조대를 꾸며 수색작업에 나서 실종 22시간만에 모두 구조되는데, 조사결과 이들은 산행이 목적이 아닌 한라산의 명당자리를 찾아 묘를 쓰려고 몰래 들어갔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와는 달리 영실 오백장군 동쪽의 묘와 한라산 1800고지의 묘를 벌초의 편의를 위해 몇 해 전에 가족묘지로 이장하는 사례도 있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명당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효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라산의 명당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본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볼 일이다. 강정효<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