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밀교장례 장엄구, 만장·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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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5-0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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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들은 사람이 죽으면 망자를 저승의 시왕에게 인도하기 위해 강림 도령과 함께 일직차사와 월직차사가 찾아온다고 설명한다. 일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망자가 죽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다는 측면에서 정말 친절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생전에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찾아오는 원스톱 서비스’로 노팁 노옵션의 프로그램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전혀 미지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여행자인 망자에게는 모든 절차를 다 알아서 처리해 주는 가이드와 같은 정말 고마운 존재가 바로 저승사자인 셈이다.

윤회를 강조하는 티베트의 ‘사자의 서’에서는 사자(死者)를 인도하는 청명한 빛을 상정하며 매일 수많은 불보살과 신중들이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한다. 비록 장황하게 도식화시켜 설명해서 현생에서는 한 분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정말 이렇게 많은 존상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다 등장할까에 대해 의심스러운 정도로 너무나도 자세한 설명에 놀라울 뿐이다. 그만큼 죽음이 이번 삶을 가치 있게 하는 한편으로 부모를 비롯한 망자의 다음 생의 행복과 안락에 대한 강한 열망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한 열망은 살아남은 자들의 명상이나 관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삶에서 영가를 극락왕생하게 시각화하는데 발현된다. 그것이 바로 불교 특히 밀교적인 장례의식이다.

불교에서는 상가에서 다양한 장례의식을 진행하고 그 가운데 다양한 장엄구를 설치한다. 그뿐만 아니라 불보살의 구제를 받아야 할 영가를 법회 또는 다비 즉 화장장소로까지 옮기는 시련(侍輦)의식에 보다 적극 다양한 장엄을 시도한다. 시련이란 결국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손수레로 옆에서 잘 모신다는 뜻으로 결국 영가를 법회에 모시고 법회가 끝난 후 다비로 정성스럽게, 그리고 법도에 맞게 모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봉녕사 묘엄큰스님의 다비식을 비롯해 많은 큰 스님의 다비식은 행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불교 신도들에게 매우 커다란 신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법회와 시련에 참여한 많은 제자를 비롯한 사부대중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간절하고도 순수한 마음이 일등공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구상화(具象化)된 수많은 만장(輓章)과 번(幡)도 커다란 몫을 했고 큰 스님 다비식 가운데 보인 오색 무지개는 이 모두에 대한 큰스님의 마음을 담은 이적인 듯하다.

만장은 문체에 따라 만사(輓詞)와 만시(輓詩)로 구분된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이 만사이고 시가 만시가 된다. 보통 길이 8자, 나비 2자 내외 크기의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서 깃발을 만들어 상여 앞에 번보다는 뒤에 세운다. 장례가 끝나면 태우기도 하고 보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장은 불교에서만 쓰는 것은 아니다. 고종 황제 장례식에서처럼 망자를 위해서 유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시골에서 전통적인 장례식이 이뤄지면 만장이 사용되므로, 만장은 오히려 우리 한국적인 장례의식의 한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다비식에서 만장에 앞서 가는 번(幡)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장엄구(莊嚴具)다. 산스크리트어로 파타카(patākā)인 번은 깃발이라는 뜻의 표기(標旗), 번기(幡旗), 증번(繒幡), 당번(幢幡)이라고 한다. 사전적으로는 부처와 보살의 무한한 공덕을 나타내며, 도량(道場)을 장엄, 공양하기 위해 사용하는 깃발이라는 뜻의 불구(佛具)다. 보통 한지에 불보살의 명칭을 써놓은 것이 대부분이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한다. ‘유마경(維摩経)’에 의하면 항마(降魔)의 상징으로 번을 세우면 복덕(福徳)을 얻어 장수(長寿)와 극락왕생(極楽往生)을 하게 된다고 적혀 있다.

원래 고대 인도에서 성자의 표식으로 썼다. 이것이 불교로 수용돼 불당 내의 기둥이나 불상 위의 천개(天蓋) 또는 고좌(高座)에 걸었다고 한다. 불당 전각 밖이나 당간(幢竿), 그리고 탑의 상륜부에도 걸어 놓게 되면서 법회 나아가 다비식 때도 사용되게 된 듯하다. 중생들이 이를 보고 불교에 귀의할 마음을 먹도록 하려는 의도도 내재해 있다.

재료는 보통은 포목을 사용한다. 보통 검은색으로 처리된 머리 위에 오색실로 수놓은 복장주머니를 2개 단다. 삼각형에 중간 몸통인 번신(幡身)은 직사각형의 장방형이다. 그 모양은 여러 가지로 세로가 길기도 하고 혹은 가로가 길기도 하며 다양한 모양의 장식물을 길게 늘어뜨리기도 한다. 보통 길이는 190∼250㎝이며, 너비는 30∼50㎝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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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록에 의하면 관정번(灌頂幡)·속명신번(續命神幡)·천망번(薦亡幡)·명과번(命過幡)·신번(信幡)·정번(庭幡)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관정번(灌頂幡)은 관정 의식에 사용되는 번이며, 정번(庭幡)은 비를 청하기 위해 옥외에서 기우제와 같은 의식을 집행할 때 사용된 번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외에도 재료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평번(平幡)은 넓은 비단으로 제작된 것이며, 사번(絲幡)은 여러 가닥의 실을 묶어서 만든 것이다. 옥번(玉幡)은 금속과 옥석을 서로 이어 만든다. 이외에도 금동번(金銅幡),사번(糸幡),옥(玉)번,판(板)번,지(紙)번 등이 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외에도 법회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번이 사용된다. 영가를 인도할 때 가장 앞에 세우는 인로왕번(引路王幡)은 주로 천도재 때 사용한다. 인로왕번은 죽은 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을 상징하며 나무대성인로왕보살(南無大聖引路王菩薩)이라고 쓴다. 오방불번(五方佛幡)은 일반 법회 때도 자주 사용한다. 다만 영가를 모실 때는 인로왕번 바로 뒤에서 영가를 인도한다. 중앙의 비로자나불번은 황색 천을 사용하고, 그 중앙에 나무중방화장세계십신무애비로자나불(南無中方華藏世界十身無碍毘盧舍那佛)이라는 붉은 글씨를 쓴다.

동쪽의 약사사여래불번의 바탕색은 청색이며, 나무동방만월세계십이상원약사유리광불(南無東方滿月世界十二上願藥師瑠璃光佛)이라고 쓴다. 서쪽의 아미타불번은 백색으로 중앙에는 ‘나무서방극락세계사십대원아미타불(南無西方極樂世界四十大願阿彌陀佛)’이라는 글씨를 검은색으로 쓴다. 남쪽은 보성불번(寶性佛幡)으로 붉은색 바탕에 ‘나무남방환희세계보승여래불(南無南方歡喜世界寶勝如來佛)’이라는 글씨를 흰색 또는 청색실로 수를 놓는다. 북쪽은 부동존불번(部動尊佛幡)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이나 황색으로 ‘나무북방무우세계부동존여래불(南無北方無憂世界不動尊如來佛)’이라고 쓴다.

한편, 불교의 영산재(靈山齋)나 예수재(預修齋)에서는 나무청정법신비로자나불(南無淸淨法身毘盧舍那佛)·나무원만보신노사나불(南無圓滿報身盧舍那佛)·나무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南無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이라고 적혀 있는 삼신번(三身幡)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삼신번을 안치함으로써 이 법회에 삼보 가운데 불보께서 자리하고 계신 곳임을 나타내려고 한다. 또한, 삼신번과 같은 의미로 종이나 헝겊 위에 그림이나 수(繡)로 불보살과 금강역사를 모신다. 법회시에는 상단에는 불보(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를 모시고, 중단에는 보살, 하단에는 금강의 순으로 배열한 인물개(人物蓋)를 설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와 도교 사상이 결합한 시왕번(十王幡)도 있다. 시왕번의 내용은 나무봉청제일태광대왕(南無奉請第一泰光大王)을 비롯해 초강(初江)·송제(宋帝)·오관(五官)·염라(閻羅)·변성(變成)·태산(泰山)·평등(平等)·도시(都市)·전륜대왕(轉輪大王)의 이름을 쓰고 그에 귀의한다는 내용이 적힌다.

이처럼 번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일본에서도 쓰였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으로 불교를 전할 때 불상, 경전과 함께 번개(幡蓋)를 약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추고천황(推古天皇) 32년인 서기 623년에 신라가 번을 보내줬다고 적혀 있다.

번은 영산재나 다비식 때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 날 때에도 번을 걸어 경사를 외부에 알리기도 했다. 겁야번(怯夜幡)이 그것이다. 앞으로 화창한 날 우리나라 많은 사찰 뜰에서 겁야번이 자주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