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조 비 정희왕후 태실 홍천 공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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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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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1453년 왕위를 빼앗기 위해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망설이는 남편에게 갑옷 입히고 거사를 마무리하도록 독려했고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뒤에는 성종의 할머니이자 자성대왕대비로 수렴섭정하며 정치에 깊이 개입했던 여장부. 그 후 성종이 20살이 되던 해 물러나 불교에 심취해 참회하며 살았던 여인.

이 여인이 바로 조선 7대왕 세조의 비(妃)인 정희왕후다.

정희왕후가 595년 전 오늘(음력 11월11일) 홍주군(홍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홍천 공작산에 정희왕후의 태(胎)가 봉안됐다’고 기록됐다. 옛날에는 태어난지 7일이내 태를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충청남도 홍주에서 태어나
강원도 홍천에 태(胎)를 묻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어떻게 된 걸까?

공작산 수타사 생태숲 해설사인 차주원(68)씨는 “정희왕후
아버지 윤번의 고향이 홍주여서 딸의 고향을 홍주라고 한 것일 뿐 실제로는 윤번이 홍천현감으로 재직하던 141 8년 홍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정희왕후의 생일을 이틀 앞두고 정희왕후의 태(胎)가 묻힌 곳으로 보이는 장소를 다녀왔다.

공작산은 예부터 ‘한마리의 공작새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하다’고 해서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 산세로 유명하다. 정희왕후의 태가 봉안된 곳은 공작산 줄기가 끝나고 수타사계곡
용담과 수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능선으로 추정된다. 한눈에 길지(吉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수타사계곡 중 물이 가장 많이 모이는 용담 근처여서 자손을 많이 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주변은 봉분모양으로 태실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각모양의 반듯한 돌들이 널브러져 있어 도굴된 것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제기됐다. 이곳은 물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뿐 아니라 목탁소리까지 잘 들렸다.

사찰내에 태를 묻은 것은 홍천현감이라는 권력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정희왕후가 불심이 깊었던 것도 태를 사찰에 묻은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

정희왕후는 세종10년 11살 때 수양대군과 결혼했다. 그런데 당초에는 세조의 배필이 아니었다고 한다.

왕궁 감찰각시가 정희왕후의 언니와 혼담을 나누기 위해 집을 방문했을때 어린 정희왕후가 동석했는데 어린아이의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정희왕후의
어머니는 국가의 혼담이 오가는 중대한 자리여서 정희왕후를 엄히 꾸짖고 방으로 돌려보냈지만 감찰각시가 다시 보길 청했다.

감찰각시의 눈에도 정희왕후의 행실이
남달라 보였다. 그리고 감찰각시의 질문에 당차고 야무지게 대답을 한 결과, 감찰각시의 눈에 들어 언니의 혼사를 꿰차고 수양대군의 아내가 됐다고 한다.

수타사는 정희왕후의 태가 봉안된 곳이어서 세조와 연관성이 많다. 사찰이름을 세조 3년(1457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수타사로 이름을 바꿨다. 세조가 편찬한 월인석보 17, 18권이 수타사 사천왕 배속에서 발견됐다.

이는 세조가 등창치료를 위해 오대산 상원사로 가면서 아내인 정희왕후의 태가 묻힌 수타사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남긴 것은 아닐까.

1984년 상원사에서 피고름에 전 세조의 속적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세조가 자신의 병세가 위독한 것을 미리 알고 그동안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지켜준 아내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한양과 상원사 가는 길과 멀리 떨어져 있던 수타사까지 방문한 것은 아닐까. 세조는 피부병과 정신질환이 악화돼 숨졌고 정희왕후는 성종 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경기 남양주시 광릉에 묻혔다.

조선왕조는 왕족의 태를 대부분 사찰에 묻었다. 조선총독부는 1928년 조선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 각지에 봉안된 왕실의 태실 53위를 서삼릉으로 옮겼으나 정희왕후의 태실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수타사는 불심이 깊었던 정희왕후의 후광으로 왕실에서 관리했다. 왕실의 후광이 없었다면 월인석보를
보관할 수 없었다.

차주원 해설사는 “수타사 주변에
묘지가 전혀 없는 것은 왕실에서 관리한 증거”라며 “공작산수타사는 정희왕후의 태가 봉안된 곳이어서 역사적인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