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에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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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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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봄날, 동료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대학이라는 큰 조직에서 하나의 부품이 빠져나갔다. 죽음을 부품 결손처럼 냉정하게 바라보는 나 역시 조직의 부품이다. 죽은 이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아, 그도 마침내 번거로운 일을 끝내고 어깨짐을 벗었구나.”
봄이 무르익었다. 벚꽃 철은 지났지만 그 대신 생명을 구가하듯 온갖 봄꽃들이 어지럽게 피었다. 이 계절엔 나는 항상 죽음을 생각한다.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내일일지 10년 뒤일지, 아니면 더 나중이 될지 예측할 순 없지만 내게는 아직 ‘죽는다’는 꽤나 번거로운 일이 남아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3월 말에 동료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N교수라고 해 두자. 부보를 접했을 때도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 그도 마침내 번거로운 일을 끝내고 어깨짐을 벗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N교수와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어쩌다 같은 직장에 몸을 두고 있었을 뿐 오랫동안 거의 말을 걸어 볼 기회도 없었다. 한데 지난해 새로 전임교수를 채용할 때 그가 인사평가위원회 책임자가 됐기 때문에 조직상 상급자에 해당하는 나와 이런저런 상담을 하게 됐다. 인사는 스트레스가 심한 작업이다.
 
수많은 응모자 중에서 연구 업적, 교육 실적, 그리고 사람 됨됨이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마지막 한 사람의 후보자로 좁혀가는데, 만인을 납득하게 할 완벽한 인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대학이라는 조직은(이건 내 일터의 장점이기도 한데) 한가락 한다는 기인까지 포함해서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장소이다 보니 어떤 인사를 하든 불만과 비판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N교수의 성격은 그런 일에는 맞지 않았다.
 
N교수는 지난해 가을 건강을 잃더니 종종 휴강을 했다. 해가 바뀐 뒤 그가 심각한 병명을 통고해 왔다. 상급자인 내가 그의 결근이나 휴직 절차를 밟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병명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아, 이건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재빨리 그가 빠져버린 구멍을 어떻게 메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대학이라는 큰 조직에서 하나의 부품이 빠져나가면 가능한 한 무난하게 부품을 보충하는 것, 그것이 내게 지워진 직무다. N교수의 죽음을 부품 결손처럼 냉정하게 바라보는 나 자신도 그 조직의 부품인 것이다.
 
N교수는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장례는 그의 고향인 니가타의 교회에서 치렀다. 나는 장례 전날 시간을 내서 그 교회로 가기로 했다. N교수한테 개인적인 고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 총무과에서는 그것을 공무출장으로 처리하면서 출장 여비를 주겠다고 했다.
조직 사정에 어두운 나는 당혹스러웠으나 총무과에서는 그건 관례로 돼 있고, 장례식에는 총장을 비롯한 대학 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는데 그것도 모두 공무출장 처리한다고 했다.
“아하, 그렇군. 사태대처 요령이 잘 정비돼 있군” 하고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조직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심정이나 행위를 이처럼 관례적인 의례 행위로 바꿔 읽음으로써 교묘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경식이라는 개인의 사사로운 고별인사는 대학이라는 조직이 정한 관례에 따른 의례로 치부되는 것이다.
 
도쿄에서 3시간 걸려 시골 역에 도착하자 역 앞길에 자그마한 교회 하나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청정한 분위기였다. 장례 전날이어서 참배객은 없었다. 흰 꽃으로 덮인 제단에 관이 안치돼 있었다. 부인이 와서 관 덮개를 열고 N교수 주검과 대면시켜 주었다. 죽은 이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그 순간에도 내 속에서 밀고 올라온 것은 슬픔이나 애도의 염이라기보다는 “마침내 어깨짐을 벗었군요”하는 위로의 기분이었다. 거기엔 약간의 선망의 기분도 들어 있었다.
부인이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질책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부인 앞에 선 나는 대학이라는 조직의 부품이니까 그런 질책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나오면 나는 부품으로서 대응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잘 몰랐다.
 
하지만 부인은 나를 질책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N교수가 최후의 3주일을 가족과 함께 평온하게 보내고 큰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겨우 30분 정도 머문 뒤 다시 3시간 걸리는 길을 되밟아 도쿄로 돌아왔다.
일전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나의 옛날 저서를 찾아내 펼친 적이 있다. <민족을 읽는다>라는 작은 책이다. 그 책 마지막 장을 무심코 읽어가다가 다음과 같은 한 구절에 눈이 멈췄다. “나라는 인간이 올해 벌써 42살이 됐습니다…”
나는 들었던 책을 내려놓고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58살이다. 말하자면 그 책은 쓴 지 15~6년이나 된 책이었다. 새삼스럽게도, 마치 진귀한 발견이라도 한 양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감회를 느끼게 될까?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야지”라거나 “여든살까지는 살아야지” 하는 식으로 생각할까? 그렇다면 나는 보통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때 인생이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것이 그때 내 마음을 채운 감회였다. 42살이었을 때가 행복의 절정기였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전혀 쓸모없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는 거라면, 설사 그때 인생이 끝났다고 해도 그뿐,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죽는다’는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