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 오래된 새 길을 가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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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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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보는 오래된 시각 -

재미도 없는 글을 열심히 잘 쓰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잘 참고 읽어주고 계신 독자분들도 참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번 글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엮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드리고자 한다. 참 재미없었던 천문학과 음양론, 그리고 오행론이었는데, 아무런 생각없이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러한 재미없는 이야기가 본래의 주제인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이 다소 이상하지 않을까?

첫 글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오래된 새길을 가야한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그 배경과 앞으로의 논의에 대한 점검을 통해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모색할 시간이다.

인류는 어느 누구도 죽음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흔히 임사체험 또는 근사체험이라고 해서 죽음을 경험의 영역으로 가지고 오고자하는 노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정의가 적어도 다시 살아나지 않는 상태를 전제로 한 이상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죽음이후의 세상을 살펴 본 경험자는 없다.

얼마전 미국에서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후 세계를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반갑지 않은 뉴스가 등장했다. 임사체험(臨死體驗)이 사실은 꿈의 일종이라는 연구 결과를 최근 미국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가 발표한 것이다.

영혼 비슷한 것이 육체를 벗어나(유체이탈) 터널을 통과한 뒤 밝은 빛을 향해 날아간다는 것이 임사체험의 전형적 줄거리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것은 자각몽(自覺夢)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자각몽은 일반적인 꿈의 형태와는 달리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꾸는 꿈을 말한다.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꿈의 내용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현실처럼 생생한 데다 나중에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자각몽의 특징이라고 한다. 1913년 네덜란드의 내과의사 F.V.에덴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며, 원인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듯 죽음의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 죽음을 정복할 능력은 없다. 단지 삶의 영역을 늘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결국 삶과 죽음은 다른 세계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가능해진다. 죽음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정말로 천당과 지옥이 존재하고, 천사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까? 그런데 이런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주의해야할 점은 누구나 죽음이의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아마 인류역사를 통해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거짓말, 또는 발명은 죽음이후의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본다. 죽음이라는 상황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인류에게 죽음이후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믿도록 함으로써 인류는 삶의 시간동안 종교나 권력이 요구하든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받게 되었고, 즐거이 그 요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죽음이후의 세상을 만들어 내면서 도덕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누구나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윤리적 인간의 감성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 죽음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지금 보이는 짐승의 삶과 인류의 삶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진짜로 “개같은 내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이후의 세상을 발명한 선조님들께 늦게나마 지면을 통해 감사드리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 발생한다. 죽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저승을 만들어 내기는 했는데, 어떤 모양인지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떤 세상인지 여러분들도 궁금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조금 다른 세상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자신이 살던 세상의 연장선상에 놓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승에서 왕으로 살았던 사람이 저승에 가면 노비로 살아간다면 누가 죽고 싶겠는가? 적어도 이렇게 죽음이후의 세상까지 고민해야할 사람이라면 호구책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민초들은 아니었을 것이고, 지배계급의 사람들이 학문을 한답시고 만들어낸 세상이 저승인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에 의해 완성된 진시황릉을 예로 든다면 이 병마용갱(俑坑 : 인형이 묻힌 땅굴)은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왕이 죽으면 사람을 같이 묻는 풍습 대신, 군사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을 묻어 시황제를 호위하게 한 것이다.

8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생생하고 그 생김새가 각각 다른 것으로 보아, 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발굴은 진행 중이며, 전문가들은 완전 발굴까지 1백여 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그런데 왜 이런 무덤이 필요했을까? 그 답이 이승의 삶이 저승으로 연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공자와 제자 계로의 대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 섬김을 알리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계로가 다시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는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런 대화의 내용을 통해 일부 유학자들은 공자 또는 유교가 내세나 죽음을 염두에 둔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런데, 말의 뜻과 의미를 바꾸어 본다면, 사람을 잘 섬기면, 귀신도 잘 섬길 수 있다는 말이 되고, 삶을 잘 안다면, 죽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건 아닌지?  이런 의문에서 필자의 학문적 고민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가 이 세상을 잘 알면 저 세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그 질서가 어떤지 알 수 있다면 그들이 생각한 저승의 모습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승의 모습이 天圓地方이고, 우주의 질서는 陰陽五行論이다. 그래서 무덤의 모양이 둥근 복발형(覆鉢形:밥그릇을 뒤집어놓은 모양)의 원형분이 된 것이고, 신주의 모양은 모두 천원지방의 모양을 하게 된 것이다. 무덤에 사신을 배치하고, 망주석에 세호(細虎)를 새겨 세상의 운행을 말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된 새 길을 가기위해 그리도 재미없는 고천문과 음양오행론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시간을 가지고 지금까지의 글들을 새삼 되새겨보면서 앞으로의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 같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