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님의 입적과 무소유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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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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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길이다. 어느 누구나 이 세상에 육신을 짊어지고 오면 잠시 잠간 있다가 가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아무리 못난 사람도 이 세상은 영원히 두지 않는다. 나면 자라고 늙고 사라진다. 인간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것들은 모두 그 수명이 다하면 없어진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지구 위에 있는 만물에게 공평하게 작용된다. 사람들은 세월이 간다고 말하지만 지구는 그저 그렇게 돌아가고 그저 그렇게 지낼 뿐이다. 모든 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인간들이 자기 편한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아무리 견고하게 지은 구조물도 세월이 가면 노화되어 없어진다. 소주병은 500년이 지나면 없어지고 바위도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면 사라진다. 이렇듯 지구 위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없어지는 것이 공평할 뿐이다. 특히 인간은 이 땅 위에 생겨날 때부터 살다가 가는 나그네로 지음 받았다. 인간을 만든 절대자는 인간을 영원히 이 땅 위에 두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연한이 되면 이 땅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땅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종교학자들은 말한다. 이론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반대론자들도 있다. 종교를 만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 자신을 위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종교에 의지하여 살다가 가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에 종교가 있다는 말한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죽음을 초월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귀신을 믿지 않았다. 공자는 ‘인간을 알지도 못하면서 귀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귀신에 대해 초월한 듯이 보이지만 삶 자체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귀신의 세계인 영적 세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소유를 강조한 어느 스님이 입적했다는 보도로 며칠을 뉴스로 장식했다. 자신이 죽으면 관에 담지 말고 장례식도 간편하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소유에 대한 책도 발행하고 무소유에 대한 실천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던 모든 책을 절판하라고 하고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빨리 잊어버리도록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새 옷을 갈아입으면 다시 한국에 태어나서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말도 남겼다고 전해진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다시 태어남을 말한 것은 무소유를 가장한 집착의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불교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죽어서 서방 정토에 태어나는 것은 불국토의 나라에 태어나는 것으로 인간의 옷을 입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죽음을 빙자하여 새로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다시 온다는 것은 새로운 집착을 만드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을 단절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교의 한 방법을 차용하여 제사를 지냈다. 조상을 만난다는 미명아래 자신의 죽음 이후를 기억해 달라는 의미와 자신도 조상신의 반열에 서고 싶다는 생각들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소유는 소유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형의하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실체적인 것을 버리는 개념이 아니다. 무소유는 산스크리트(인도아리아어(語) 계통으로 고대인도의 표준문장어)의 시마티가(simatiga)를 번역한 말로 무소득이라는 말이다. 일반용어로는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단순하게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범위를 넘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결국 무소유는 그 존재의 상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얽매이지 않는 곳이 삼매의 경지이고 그 삼매의 경지가 사공처의 하나인 무소유처인 것이다. 그 스님은 스스로 무소유처를 찾았다. 그러나 인간세상, 이 지구에서 육신을 짊어지고 사는 곳에 무소유처란 곳은 없다.

무소유처는 중천(中天)을 말한다. 중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음의 세계이고 중음은 사람이 죽은 다음 49일 동안의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다음 육신의 귀의처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무소유처는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무소유를 하나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무소유를 말하면서 무소유처를 갖는 것은 결국 다음 생을 준비하는 집착의 시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소유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회갑이 지나면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옷도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나누어 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나누어 주는 생활을 한 것이다. 특히 무소득으로 생긴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저승 갈 준비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식들이 사준 좋은 옷, 먹을거리를 나누며 살았다. 베푸는 삶, 나누는 삶, 공유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다음을 준비해간 것이다. 회갑잔치가 그 시발점이 되어 그 이후부터는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탐욕을 버리고 내면세계의 찌꺼기들을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버리면서 이 세상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맑은 정신으로 육신 벗기를 소망하며 살았다.

무소유는 갖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는 갖되 나누는 것이고 갖되 베푸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갖기에만 발버둥친다. 권력도, 돈도, 명예도, 건강도, 모든 것들을 갖으려고 한다. 문제는 너무 가지려는 것에 있다. 무소유는 사람을 단순하게 만들어 집착을 버리는 것이고 아집을 버리는 것이다. 부유와 넘침이 판을 치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소유의 정신이 포함된 나눔을 통한 베풂이 필요할 때이다. 무소유는 결코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고 베풀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느 스님의 입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박철호생사의례문화연구소/ 소장 박철호 목사(시인,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