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 아름다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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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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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산대 최청자강사
 
죽음이란 무엇일까. 더욱이 행복한 죽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누가 물어 본다면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또 죽음에 행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지 조차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죽음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겐 필연적으로 해당 되는 것이지만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가야 하는 문제 못지않게 죽음의 문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하면서 죽음의 문제는 잊고 살고 싶어 한다. 죽음은 언제나 삶의 그림자로 함께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어디서든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사람들은 ‘웰빙’을 외치면서 그 속에 ‘웰다잉’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웰빙’과 ‘웰다잉’은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살아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피하고 싶은 금기의 영역이고 노인에게 국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을 가진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게 싫어하는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결코 태어난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 누구나 반드시 죽음과 마주대하게 되기 때문에 죽음은 준비하고 맞이하여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우리의 현실은 하루하루가 바쁜 세상이고,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 주위에서 젊은 나이에 병마와 싸우면서 죽음과 대면하는 것을 보든지, 어린아이들이 암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 그들은 소수의 불행한 사람으로 여겨 연민을 느낄지언정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처럼 죽음은 언제나 남의 일일 뿐 자신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믿고 싶어 한다. 결국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해야하는 현실에 대해서 수용의 자세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아침에 깨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잠들지만 깨어남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없다. 죽음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덮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수많은 위험요소들은 더욱 죽음의 순간을 앞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죽음은 또 다른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잠자는 듯이 평안한 죽음을 소망하지만 막상 어떻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지는 막연하고 남의 일인것만 같다. 내가 지켜 본 임종 중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않고는 정말이지 눈을 못 감으시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사람은 그렇게 보고파하던 사람이 와서 손을 잡고 깊고 진지한 얘기를 힘겹게 나누고는 또 다른 사람이 위로의 말을 하는 중에 임종을 하였다. 이렇듯 죽음의 순간에도 간절한 마음은 죽음을 머뭇거리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간절함이 편안한 임종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 남아있고, 화해를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 편안한 임종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또 텔레비전에서 본 ‘사전 장례식’ 장면이 기억난다. 죽음이 임박해서 죽어가는 환자 본인이 직접 장례식을 주도하면서 아내, 아이들, 지인들과 일일이 이별을 하는 장면을 보고 슬픔에 눈물이 났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장례식은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해와 용서의 마당이 되어 준 장례식에서 아이들은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가는 길을 먼저 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죽음을 맞이하는 시기는 언제가 적당할까. 내가 이번 학기에 강의를 맡은 동산불교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은 몇 살까지 살고 싶으십니까?”하고 물어 보았다. 학생들은 각자 처음 이런 질문을 받은 듯이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학생들은 보통 평균수명정도를 이야기 했다.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고, 사인(死因)은 자연사, 그리고 임종시에 편안한 죽음을 이야기했다. 사람의 마음은 거의 비슷한가보다.

그동안 죽음준비교육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살고 싶은지를 물으면 보통 지금 자신의 나이에 40년 정도를 더한만큼 더 살고 싶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응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다. 건강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하고 있는데 평온한 얼굴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보면 어르신들께서 ‘이제 여한이 없다’, ‘어서 죽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정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오늘 100세 생일이 지났다고 해서, 자녀가 부모의 바람대로 성장해 주었다고 해서, 또 내가 바라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해서 지금 죽어도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완벽한 죽음 준비를 하였다고 생각해도 죽음의 순간이 닥친다면 우리는 당황하고 힘들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죽음준비교육과 삶』의 별책인 ‘나의 임종노트’에는 <100세에 내가 듣고 싶은 말>이라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는 본인이 죽음을 맞이할 때 배우자에게 또는 자녀들에게는 그리고 지인들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적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죽음과 대면할 때까지의 삶의 방향을 가늠하고 새롭게 목표를 향해 나가기 위해서 기획을 한 것이다.

가령 친구00(예:홍길동)에게 ‘넌 참 배려심이 깊고 지혜로운 친구야’ 또는 ‘너 참 열심히 살았어. 좋은 아빠로, 멋진 남편으로, 착한 아들로, 성실한 친구로 말이야’라는 말을 듣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또 자녀들에게 ‘훌륭하고 값진 삶을 사셨습니다. 본받아서 저희도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기원한다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100세가 되었을 때 남겨지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원하던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결국 100세가 되었을 때 내가 들을 말을 생각하면 삶의 방향과 목표를 알 수 있고 주어진 삶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성찰하고 정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죽음이 찾아와도 지금보다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행복하게 삶을 성실하게 사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그런 죽음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