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와 사별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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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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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호스피스회 교육담당 최청자

호스피스의 현장은 많은 봉사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시간을 내어서 봉사에 임한다. 내가 봉사하는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호스피스회도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다. 3월 21일 호스피스회 총회가 있었다. 새로운 봄의 시작과 함께 더욱 발전하는 봉사의 모습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특별히 병원장님께서도 오셔서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하시는 모습이 호스피스팀의 사기를 더욱 높여 주었다.

나는 자원봉사팀의 교육담당을 맡게 되었다. 호스피스를 실천하는 현장에는 교육을 필요로 한다. 제대로 된 봉사를 펼치기 위해서 교육은 필요한 것이다. 이론만으로 호스피스 팀 활동을 꾸려갈 수 없지만 마음만으로도 되지 않는 것이 호스피스이다. 호스피스는 전문의료팀, 성직자, 사회복지팀, 교육받은 자원봉사팀 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서 팀을 꾸려 가고 있다.

사별이란 말 그대로 보면 죽어서 이별을 하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사별을 경험하지 않은, 않는, 않을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호스피스는 사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말기의 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은 예비적 슬픔을 겪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호스피스 대상자인 65세의 그 분은 이미 황달까지 겹쳐서 임종증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더위가 한창인 재작년 7월 아니 6월 말일에 처음 만났다. 내가 문을 열고 병실로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조용한 눈길로 올려다보셨다. 내가 인사를 드리자 밥은 먹었는지, 오느라 힘들지는 않았는지를 걱정해 주셨다.

난 조용히 앉아서 그저 손을 잡아 주었다. 그 분은 아들 그 중에서도 맏아들을 끔찍이도 아끼셨다. 무시로 아들에게 난 괜찮으니 가서 일하라고 하시고, 밥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건강해야 한다고 사랑스러운 어머니의 잔소리를 늘어 놓으셨다. 아들은 줄곧 어머니 앞에서 너스레를 떨면서 건재하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아이구 참 어머니 전 끄떡없어요. 괜찮다니까요...”라고 하면서 6인 병실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환자가 물을 달라고 하셔서 빨대를 대어주니 어린 아기처럼 예쁘게 드신다. 조금 밖에 먹지를 못하지만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때가 식욕이 있으니 아직은 희망이 있을 때이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열리는 9월 초순에 그 분은 훠이 훠이 이생의 삶의 끈을 놓으셨다. 그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뵙고 정도 나누고 몇 번인가 보호자 석에서 자면서 밤을 함께 보내기도 하였다. 마지막까지 배려의 마음을 나누어 주시더니 임종도 내가 있을 때 하시었다. 의사는 달려와서 심장이 멈추었는지 그래프를 만드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빨리 사망이라는 신호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6인 병실에서 맞는 임종의 모습은 휭했다. 나머지 5침대에서는 두려움이 섞인 시선을 보내었고 간이 가리개로 가린 임종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임종문화가 없기로서니 가고 옴의 현장이 이리도 산 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저 치뤄 내어야만 하는 사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 날 환자를 살리기 위한 별도의 조치는 없었다.

더 이상 심폐소생술도 사용하지 않았다. 잠시 뒤 의사는 사망하였다는 선고를 하였고 어느새 연락이 되었는지 병원 장례식장 팀에서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와서 고인을 모셔가려고 설쳐대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내가 저지를 했다. 아무리 병실이 산 자들의 공간이고 병을 다스리는 공간이지만 너무 하지 않느냐고 내가 반문을 했다. 아직 온기도 식지 않았는데, 가족들은 고인의 죽음을 실감하지도 못하는데 영안실로 모셔가야 하는지 무언의 항변을 했다.

잠시 기다려 주는 척 하던 장례식장 직원은 옆에서 보고 있는 환자들이 두려워하니 영안실로 모시고 가야한다고 말을 했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은 짧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유족들은 아직 죽음을 인정 못하는지 그저 망연한 얼굴이었다. 임종의 현장에서는 어떤 슬픔의 표현도 드러나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이윽고 장례식장으로 내려 온 유족들은  4일장을 치르기로 하고 각자 맡은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맏아들은 무표정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은 오후 내내 술을 마시고 빈소 옆에 마련된 방에 쓰러져서 어머니를 부르면서 울고 고함을 질러 대었다. 아들은 쉰을 넘긴 나이였지만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부짖고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찾을 수 없어서 울 때를 멈추기를 기다려 주었다.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왠지 장례식장의 풍경 속에서 어색해 보였다. 그렇더라도 울음으로 사별슬픔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가상해 보였고 주위에서 아들이나 형제들이 말리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또 다른 슬픔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말기 암으로 고생 참 많이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쌍하여서 울고, 이제는 이 세상에 어머니라고 부를 대상이 사라졌음에 울고, 혼자서는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드실 아버지가 걱정되어서 울고 있는 맏아들에게 난 마음으로 위로의 시선을 보내 주었다. 작금의 장례문화가 울음마저도 앗아 가 버린 듯 하지만 그래도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그렇게 가신 분을 내 손으로 정성껏 입관을 하여 드리고 4일째에 화장을 하여서 추모관에 안치하는 현장까지 동행을 하였다. 한 줌의 가루로 남은 그 분은 차라리 안식을 찾는 듯 하였다.

2년이 지난 지금 가끔 맏아들과 연락을 하면 어떠시냐는 나의 질문에 아들은 희미한 웃음으로 답을 한다. “그렇죠 뭐..” 사별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자리에 상채기처럼 흔적은 남아있다. 아버지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서너달 지나서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는 아들의 웃음은 허허롭다.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고 떨어져 있으니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새록새록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고 가끔 추모관을 찾아서 어머니를 뵈면 늘 웃고만 있는 사진속의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걱정만 하신다고 한다.

너무 자주 찾아가지 말아야겠다고 한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시간은 자꾸 어머니와 자신을 떼어 놓으려고 한단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약도 약 나름인가보다. 이제 다시 봄이 오고 노랑의 개나리, 하늘거리는 핑크빛의 진달래가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어머니를 보낸 사별슬픔으로 힘들어하는 맏아들의 얼굴에 새 봄꽃이 가득 피어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