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마지막 무동’ 김천흥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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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3-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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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명예보유자로 ‘한국 춤의 역사’
궁중음악 배운 뒤 14살 때 ‘순종 오순축하연’ 공연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이자 ‘살아있는 한국 춤의 역사’로 불리는 심소(마음의 풍류) 김천흥씨가 18일 오전 11시50분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8살.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해금·일무)과 제39호 처용무(무용·가면제작)의 명예보유자인 고인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나 13살 때인 1922년 궁중음악 양성기관인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제2기생으로 들어가 1932년 아악수장이 되었다. 특히 고인은 14살되던 봄에 무동으로 뽑혀 순종황제의 50살 경축진연 때 근정전 어전에서 춤을 춰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알려졌다.

그는 처음에 아악부에서 해금과 양금 등 종묘제례악을 배우며 예인인생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처용무, 춘앵전 등 정재(궁중무)에도 눈을 뜬 뒤 1941년부터는 ‘한국 근대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성준(1874~1941)으로부터 살풀이와 탈춤 등 민속무까지 사사받아 정악과 정재, 민속무를 두루 아우르는 보기 드문 예인이 됐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 1971년 처용무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예인인생은 40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서울대 음악과 강사로 평생 후학을 양성하고 51년부터 국립국악원 예술사,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전통무용과 국악의 보존 및 재현 활동으로 더욱 빛났다. 또 임석재 이두현 성경린 등과 함께 한국가면극보존회 활동으로 전국의 탈춤, 남사당놀이 등 민속춤의 조사·발굴·강습에 매달렸다.

고인은 기력이 쇠해 칩거생활에 들어간 2005년 5월 전까지 국립국악원 원로사범으로 있으면서 비슷한 연배의 다른 춤꾼들이 일찌감치 무대를 떠났거나 작고해서 맥이 끊어진 상태에서 크고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후학들이 춤을 청하면 백수를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04년 12월 심재정악단 창단기념공연에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박(신호용 악기인 박을 치는 행위)이 고인의 마지막 공식무대였다. 고인으로부터 종묘제례악 일무를 전수받은 김영숙(정재연구회 예술감독)씨는 “워낙 정신세계가 맑고 욕심없으시고 늘 무용만 생각하셨다. 후학에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몸으로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 궁중무용과 민속무를 배운 수제자 하루미(국립국악원 무용단 안무자)씨도 “제자들을 회초리가 아닌 사랑으로 품으시면서 항상 ‘흉내만 내는 껍데기 춤이 아니라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서 춤을 추라’고 타이르셨다”고 회고했다.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이기도 한 고인은 대한민국 예술원상(1970), 국민훈장 모란장(1973), 금관문화훈장(2001)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종묘일무〉 〈한국무용의 기본무보〉 〈정악 양금보〉 〈정악 해금보〉 등이 있다. 유족으로 3남3녀가 있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영안실. 장례는 22일 오전 10시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에서 국립국악원과 한국국악협회, 한국무용협회 공동 국악인장으로 치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