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 사리기 명문(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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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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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출토된 사리기(舍利器)의 겉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三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27대 위덕왕)이 세 왕자를 위해 탑을 세웠다. 본래 사리는 2매였으나 장례(사리를 柱礎 중에 묻는 의식을 가리킴) 때 신묘한 변화로 3개가 되었다).”

이 명문을 통해 기본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 ‘입찰(立刹)’은 ‘절’이 아니라 ‘탑을 세우다’로 해석해야 맞다. ‘刹(찰)’에는 ‘탑’의 뜻도 있다. ‘황룡사 찰주본기’의 찰주(刹柱)가 ‘탑 기둥’을 뜻하지 않은가.

둘째, ‘亡王子(망왕자)’로 판독하고 있는 ‘망(亡)’ 자(字)는 ‘三(삼)’ 자의 이체자(뜻과 음은 같지만 형태가 다른 글자)이다. 이는 방주타 묘지에서 확인되므로 ‘三王子’가 맞다. 셋째, ‘장시(葬時)’의 장(葬)에는 ‘묻는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사리를 기둥초석 중에 묻는 의식을 가리킨다. 탑은 본래 무덤을 가리키므로, 탑 안에 정골(精骨)인 사리의 안치 행위는 장례와 같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정리된다.

첫째, 탑을 건립하게 된 시기와 목적이 밝혀졌다. 577년에 “백제왕 창이 세 왕자를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성왕의 딸인 공주가 선왕을 위해 탑을 세운바 있다. 마찬가지로 ‘세 왕자’가 고인이 되었기에 부왕이 목탑 건립을 추진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덕왕의 뒤를 70세 쯤의 고령인 아우 혜왕이 계승했다. 물론 ‘아좌 왕자’의 존재가 ‘일본서기’에 보인다. 그러나 왕제(王弟)도 왕자로 표기한 만큼, 그는 위덕왕의 아우일 가능성도 있다. 혈통은 왕제지만 신분은 왕자인 것이다. ‘창왕사리감명문’에서 성왕의 딸을 ‘공주’라고 한 데서도 방증된다. 혹은 아좌 왕자의 서출(庶出)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위덕왕의 세 왕자가 즉위하지 못했음은 그들의 조사(早死), 아마도 전몰 가능성을 높여준다.

둘째, 백제 왕실의 사리 공양이다. 능사 목탑의 경우는 위덕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사리를 왕이나 공주가 공양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지고(至高) 지보(至寶)하여 상징성이 큰 사리에 대한 독점적 점유와 분여권의 왕실 독점 현상이 포착된다. 이는 성왕 이래 백제왕의 불교 교단 장악과 종교적 수장으로서의 위상 유지와 관련 있다.

셋째, 탑은 577년에 건립되었으나, 왕흥사는 법왕대인 600년에 창건이 시작되었다. 능사도 567년에 목탑이 건립된 후 일정 기간이 지나 사찰이 창건되었을 가능성이다. 목탑을 제외한 능사 여타 건물들의 상한 연대를 재고시켜 준다. 추복탑에서 사찰로 기능이 확대된 것이다.

넷째, 위덕왕이 순국한 왕자들을 위한 발원탑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리 이적(異蹟)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진한 전쟁의 정당성을 말해 준다. 그럼으로써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호국(護國)에너지 결집에 지대한 자산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적 효과를 계산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응험(應驗) 현상은 무왕대의 제석정사(帝釋精舍) 목탑 화재 건에서 보듯이 정치적 기제로써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왕흥사 창건 전에 건립된 목탑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위덕왕 발원탑’ 혹은 ‘위덕왕 3왕자 추복탑’으로 명명(命名)하는 게 좋다.

위덕왕은 왕흥사지 사리호 명문에 ‘백제 창왕’이 아니라 ‘백제왕 창’으로 자신을 표기했을 정도로 세속의 위세는 티끌처럼 날려버리고 있었다. ‘백제왕 창’은 부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자 했을 법하다. 위덕왕이 가슴에 품고 있는 이 같은 정서를 헤아리면서 이번에 발굴된 왕흥사지 사리기의 명문이 지닌 의미를 평가해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