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년 전 고려 사람들의 장례문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8-08-24 12:17

본문

고.jpg

고려시대. 사회적인 명망도 있고, 꽤나 잘사는 가문의 사람이 죽었다. 가족들은 슬픔에 잠겨 죽은 이의 장례를 준비한다. 행세깨나 했던 이 집의 사람들은 죽은 이를 애도하며 당시 유행하던 불교식 화장(火葬)을 진행하고 뼈를 추려냈다.

그리고 지역에서 유명한 석공을 불러 석관(石棺)을 만들게 하였고, 석관 내부에 여러 문양과 사신도를 새겨 넣고 묻었다. 이 석관은 900여년이 지나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즘도 유행하는 장례문화가 있듯이 900년 전 이 땅에 살던 사람들도 선호하는 장례문화가 있었다. 지금부터 900년 전인 고려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장례문화가 있었을까.

장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지역과 시대, 계층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려시대 왕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화장 후에 남은 유골을 석관 안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내세의 평안을 위하여 석관 안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도 혹은 12지신을 새기기도 하였고, 석관 안쪽의 천장에는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등의 별자리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이는 피장자의 사후 생활을 지키는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서민들은 주로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땅에 묻었다. 그 중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크기가 작은 석관에 넣었거나, 옹관(甕棺)에 넣어 묻었기도 하였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에 행하는 장례문화도 있다. 1123년(인종1)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들 가운데 버려두어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라는 대목이 있다. 이를 통해 장례 치를 형편이 되지 않거나, 전염병이 돌았을 경우에는 풍장(風葬)이나 조장(鳥葬) 등을 시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에는 고려시대 석관과 옹관이 있다. 석관은 길이 95㎝, 높이 35㎝에 바닥 판, 네 벽면, 덮개 총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관 벽면 내부에는 동서남북 방위를 상징하는 사신도가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옹관은 2005년 경기도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서 발견되었다. 옹관 주변에는 고려백자접시를 비롯한 중국 수입품인 흑유자기 등이 묻혀있었고, 내부에는 신장 165㎝ 안팎의 성인 남자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두 유물 모두 고려시대 장례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죽은 이가 편히 잠들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한다. 고려 사람들의 장례문화 중 하나였던 석관과 옹관은 ‘2018 경기천년 기념 특별전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고려도경>’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박물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 학예사 김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