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버지의 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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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8-06-2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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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영조는 왕이면서 글을 짓는 작가이기도 했다. 조선의 왕들은 글을 많이 짓지 않았고, 짓더라도 왕으로서 필요한 글만 짓는 경우가많았다. 이런 글들은 대개 당대의 신하 중에 문장가가 짓는 경우가 많으므로 왕이 직접 지은 글은 특별히 ‘친제’(親製)라는 말을 붙였다. 왕의 글을 ‘어제’(御製)라고 하는데 실제 왕의 어제 분량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어제 중에 친제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영조는 친히 지은 어제가 가장 많은 왕으로 여겨진다. 영조의 친제 분량이 어느 정도일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5000여편으로 알려진 영조어제첩의 창작 시기가 만년의 5년간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평균 1년에 1000여편을 지었던 셈으로 얼마나 많은 글을 지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영조의 다작은 천부적인 집필욕 때문이었던 듯하다. 영조는 65세인 1758년 부왕 숙종의 어제보다 많이 집필했기에 그 이상 집필하는 것은 부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절필을 선언한다. 그 후 일이 년은 시를 쓰지 않은 듯하나 곧 다시 집필을 하게 된다. 훈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집필이라고 변명하였지만 이전보다 더 왕성하게 집필함으로써 왕성한 집필욕을 드러냈다.
 
영조는 독특한 문체를 많이 남겼는데 훈계서는 그중의 하나이다. 정조가 간행한 ‘봉모당봉안어서총목’(奉謨堂奉安御書總目)에 85편의 영조대 간행서가 있는데 이 간행서 대부분이 훈계서일 정도로 영조의 훈계서 사랑은 남달랐다.

48세인 1741년 ‘대훈’(大訓)을 간행하게 하는데 이 책이 영조가 편찬한 훈계서의 시작이다. 대훈은 1721년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추진했던 노론이 물러나면서 발생한 옥사와 이듬해 노론이 경종의 독살을 기도했다는 목호룡의 고변 후 노론 4대신이 처형을 받은 옥사를 일컫는 신임옥사(辛壬獄事)에 대해 영조 즉위의 당위성을 천명한 훈계서이다.

이후 수시로 훈계서를 간행하여 반포하는데 이처럼 왕이 지은 글을 수시로 간행하여 반포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영조의 독특한 창작방식이었다.
 
1741년에서 1759년까지 한 해에 1, 2편 정도만 짓던 훈계서 숫자가 1762년 5편으로 증가했다. 1769년에는 9편, 1773년에는 10편이나 간행했다. 훈계서의 내용은 대체로 훈계와 귀감, 추모와 회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아들 사도세자에게 내린 훈계가 많았다. 1745년에서 1761년까지 11편을 사도세자에게 내렸다. ‘상훈’(常訓)(1745), ‘상훈언해’(常訓諺解·1745), ‘자성편’(自省編·1746), ‘자성편언해’(自省編諺解·1746), ‘정훈’(政訓·1749), ‘회갑편록’(回甲編錄·1754), ‘훈서’(訓書·1756), ‘훈서언해’(訓書諺解·1756), ‘고금연대귀감’(古今年代龜鑑·1757), ‘속상훈’(續常訓·1758), ‘속자성편’(續自省篇·1759) 등이다.

영조의 훈계는 책으로 간행되고 또 언해로도 편찬되어 누구나 볼 수 있었고 사도세자가 지켜야 할 훈계의 내용이 무엇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훈계 내용을 일일이 지킬 수 없었던 세자에게 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자성편은 영조가 경연에서도 강론하게 한 회심의 작품이었다. 사도세자에게 가르치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어 훈계하였다.

내편에서는 영조 자신이 경험한 바나 들은 내용, 경서 등의 구절에 대한 의견 등을 두서없이 제시하면서 훈계조로 수신의 방식을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조는 13세부터 배움에 임했지만 집안의 엄한 법도에 따라 태만하지 않았으며, 조심하라는 교훈을 지켰고, 아버지 숙종이 아플 때 7년간 모시면서 탕약을 끓였으며, 지금까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하였다. 형인 경종을 사랑하여 의릉(경종의 능)을 볼 때마다 심기가 손상되었다고 하면서 세자도 자신을 섬기는 마음으로 경종도 섬길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사람의 본성이 어려움을 참기 어렵다고 하나 자신의 경험으로는 이는 함양의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경서에 대한 느낌도 전하고 있다.

영조는 논어의 가르침을 실제 현재에도 실천하려 한다고 하였고, 잘못을 고치는 것의 중요성이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수신서로서 소학의 가치도 언급하였다. 경서와 역사서 및 기타 서적이 모두 훌륭한 훈계서임을 강조한 셈이다. 아울러 자신이 어려서 편벽되었으나 이를 고치려 노력하였고, 식욕과 색욕은 특히 군왕이 부릴 경우의 폐해가 크기에 억제하였다고 하여 수신의 자세, 특히 군왕으로서의 엄격한 절제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요구가 사도세자에게는 숨을 막히게 하였던 셈이다.
영조는 자성편 외편에서 본받아야 할 조선의 군왕상으로 세종과 자신만을 거론하였다. 세종이 야근하는 집현전학사 신숙주에게 옷을 덮어준 일과 한글을 창제한 일을 칭송하였으며, 자신의 업적으로는 1739년에 실시한 친경례(親耕禮)와 1746년에 ‘속대전’(續大典)을 만든 일을 내세웠다. 속대전은 ‘경국대전’에서 당대에 적절한 법규만을 선택하고 보완하여 만든 실질적 법전이다. 글과 법은 다르지만 백성의 삶을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세종과 겨룰 만하다고 여겼던 셈이다.

자성편을 짓고 13년 후인 1759년 66세의 영조는 ‘속자성편’을 지었다. 여기서 영조는 세종의 ‘삼강행실도’, 관우의 넋을 기린 숙종의 관왕묘시, 그리고 정몽주를 칭송한 자신의 선죽교시 등을 들어 충효를 강조하였다. 13년 전의 글이 실질을 강조했다면 이번에는 관념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이다.

1746년 자성편을 짓던 53세의 영조나 1759년 속자성편을 짓던 66세의 영조는 모두 세종과 자신을 조선 최고의 군왕으로 여긴 점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신하를 감싸는 ‘관용의 군왕’에서 윗사람에 대한 충효만 강조하는 ‘강요의 군왕’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는 결국 이런 훈계를 견디지 못하고 광증을 드러내다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고, 아버지 영조의 뒤를 잇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어린 나이에도 할아버지 영조의 훈계를 잘 이어 받아 왕위를 계승하였다.

1760년 이후 영조의 훈계는 세손으로 옮아갔으며, 1776년 승하할 때까지 14편의 훈계서를 세손에게 내렸다. 9세 세손에게 처음으로 내린 훈계서 ‘서시세손’(書示世孫)에서 영조는 세손의 의젓함을 칭찬하면서도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1764년 ‘조훈’(祖訓)에서는 13세,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인 손자에게 성인(聖人)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직접 조훈을 지어 우리 손자에게 당부해 본다. 성현이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네게 달려 있단다.”(親製祖訓 勉我?子 爲聖爲賢 惟在乎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