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유적의 존재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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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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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에서 강변북로를 타고 한강 상류 쪽으로 죽 거슬러 오르다 보면,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선을 막 지나 남양주시로 접어드는 들머리에 ‘수석동’이라는 이름의 강변마을이 나타난다.   한강변에 위치한 여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조망이 좋은 자리에는 어김없이 향토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긴 하지만, 바로 이웃에 백제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수석리토성(경기도기념물 제94호)를 끼고 있는 탓인지 주변 일대가 그다지 어수선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수석리토성말고도 이따금 문화유산 답사객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공간이 있다. 조선초 태종 때에 장원급제하여 대마도정벌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趙末生·1370~1447)의 묘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요사이 방영되는 어느 인기사극에서 사사건건 세종대왕에게 맞서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원래 그의 묘지는 양주땅 금곡에 있었으나 대한제국 시절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홍릉을 새로 천장하는 자리를 물색하던 과정에서 그 후보지로 지목되어 1900년 9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의 묘역 앞에 있던 신도비(神道碑)는 좀 더 세월이 흐른 1938년 5월에야 그 뒤를 따랐다.   신도비라는 것은 죽은 이의 생전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관리들 가운데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되는 때에 건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말생 신도비의 경우 숙종 때인 1707년에 조성되었다.   현재 조선시대의 신도비로서 보물로 지정된 사례는 보물 제584호 윤문효공신도비 단 한 건이 있을 뿐이지만, 나머지는 대개 지방유형문화재, 지방기념물,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말생 신도비에는 이것들과는 다르게 좀 생소한 ‘향토유적 제8호’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그렇다면 ‘향토유적’이란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지방자치법시행령에 '비지정문화재(향토유적 등)의 보존관리'를 시군자치구 사무내용의 하나로 규정함에 따라 이 조항을 근거로 시군단위에서 설정한 유적관리등급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통상적인 문화재보호법의 테두리 및 운영방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존재이다. 더구나 향토유적은 ‘글자 그대로’ 비지정문화재의 범주일 뿐이라서 그 자체로 온전한 문화재의 보전관리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보더라도 조말생신도비가 왜 향토유적이라는 등급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금이라도 이 신도비는 서둘러 지방유형문화재 또는 문화재자료 이상의 등급으로 승격지정하여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왕에 향토유적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니,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큼은 꼭 지적해두고자 한다. 향토유적이란 것이 제 아무리 등외의 문화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방식의 관리제도나마 제대로 채택하지 않고 있는 시군자치구들이 의외로 적잖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혹여 우리 고장에 향토유적의 지정과 관리에 관한 조례조차도 만들어두지 못한 곳이 있다면, 차제에 이러한 향토유적 관리제도의 도입을 적극 권해드리고자 싶다.   향토유적이라는 존재가 탄탄하다면 그러한 밑바탕 위에 풍부한 시도지정문화재의 확보가 가능한 것이고, 나아가 다양한 시도지정문화재들이 존재해야만 그 가운데서 미래의 국보와 보물들이 잇달아 탄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하는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