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내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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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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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관련하여 내가 즐겨 쓰는 말은 <논어>의 ‘계씨’ 편에 나오는 ‘제나라 경공은 말이 4천 필이었지만 그가 죽자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그의 덕에 대해 칭송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지만 사람들은 후세까지 그를 칭송하고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공자가 아마 죽음의 본질에 대해 설파한 것이라기보다는 살아 있을 때의 처세와 관련하여 한 말이다. 당시 말은 재산 가치로 굉장했을 텐데 한 필도 아니고 4천 필이라면 요즘으로 치면 재벌급이겠다. 부와 권세를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경공도 결국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백이 숙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형제인 이들은 서로 왕위를 양보했고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는 것을 말렸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가 죽었다는 인물이다. 논어의 이 구절에서 어떤 사람은 덕(德)을 읽고 가고 어떤 사람은 절조(節操)를 읽고 가기도 한다.   근래 국내외 큰 정치인들이 많이 작고했다. 그제 신문에는 미국의 상원의원인 에드워드 케네디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알려진 바처럼 존 F. 케네디의 막내 동생이다. 케네디 집안의 영예와 비극에 대해서는 웬만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어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에드워드 케네디가 돋보이는 것은 그가 명문 하버드를 졸업한 30세부터 시작해 47년간 상원의원을 했다거나 민주당의 단골 유력 대통령 후보였다는 정치적인 비중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로 미국 내의 사회적 약자들과 세계시민들의 평화에 기여하는 정책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당선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그의 오바마 지지가 어떤 정치적인 이해득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의 대표적인 백인 명문가에서 흑인 대통령 후보를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지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선택에서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라는 음습한 냄새는 맡을 수가 없는 게 분명하다.   국내에서는 지난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공과가 있지만 그래도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민주화와 동서,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과 약자를 배려한 정책 등에 대해서는 평가해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얻은 소책자에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2009. 1. 14)는 일기가 보였다. 고인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을 기록한 것 같았다. 고인 생전에 이러한 철학을 얼마나 정치와 정책에 반영했느냐와는 별도로 문장 자체가 깊은 공감을 주는 글이다.   마찬가지로 올 초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탈권위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역대 어느 정권보다 노력한 정권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대표적인 게 분배를 중시한 정책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정치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조의를 표하는 것은 이들이 살아생전 누렸던 부귀와 권력 때문이 아니다. 앞서 인용한 바 있지만, 경공은 말이 4천 필이었지만 백성 그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다. 나누어 갖는 삶의 위대함, 약자를 최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그럼으로써 스스로가 좀 더 존엄해지고 당당해지는 인간의 위엄 같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죽음이 이들의 죽음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후한 평가가 될까?   이들의 죽음은 우리가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훈육으로 읽힌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분쇄해 파편화시키는 ‘악마의 맷돌’(폴라니)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홉스)이라는 이 극단의 경쟁 속에서 남을 이기지 않고 살아남기 힘든 야만의 계절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은 무한 욕망 속을 질주하는 브레이크 없는 삶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솔직해지고 정직해질 수 있다.   입추, 처서 지나고 들판의 곡식이 무르익는 백로(白露)를 앞두고 있다. 백로란 풀잎에 맺힌 이슬이란 뜻이다. 중국의 어떤 시인은 인생에 대해 풀잎에 내린 이슬이 마르는 짧은 순간이라고, 삶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인생이다. 몇 정치인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 삶을 어떻게 끌고 갈지를 고민해야 할 가을의 초입이다.   김용락 경북외국어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