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어진은 수백년 풍파에도 어찌 살아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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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8-10-2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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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영화나 TV드라마를 통해 자주 후손들에게 소환되는 조선의 임금이다. 그의 삶과 시대가 가진 역동성 때문이다. 시대상이 혼란했던 만큼 세조에 대한 현재의 평가가 엇갈린다. 아버지 세종의 충신들을 마구 죽이고, 조카인 단종을 몰아낸 뒤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라는 악평과 중앙집권체제 강화, 국방·경제 정책 정비, 경국대전 편찬 착수 등 나라를 안정시킨 임금이라는 호평이 공존한다. 당대의 평가는 어땠을까. 그는 “나라를 다시 세운 왕”으로 숭배를 받았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 22일 개막한 특별전에서 공개한 ‘세조 어진 초본’은 세조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1935년에 화가 김은호가 그린 초본으로, 완성된 그림은 아니지만 몇 점 전하지 않는 조선시대 어진 중 하나다. 전기 임금의 것으로는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뿐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 특별하다. 조선의 많은 임금이 어진을 남겼으나 대부분은 전란과 화재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기 임금임에도 태조, 세조의 어진이 현전하는 데는 나라를 창업하고, 다시 세운 임금이라는 최고의 평가를 당대에 받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조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그가 태조 이후 처음으로 묘호(廟號: 임금이 죽은 뒤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아 올리는 존호)에 ‘조’(祖)를 붙인 임금이라는 데서 드러난다. 조는 나라를 세운 공이 있거나 정통을 다시 세운 왕에게 바치고, ‘종’(宗)은 덕이 큰 왕에게 붙였다. 원칙적으로 조와 종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 임금들은 종보다 조를 붙이는 것이 더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고종이 스스로를 황제를 높이고, 자신의 위로 4대를 추숭하는 과정에서 ‘정종’을 ‘정조’를 바꿨다는 점도 종보다는 조를 높게 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높은 평가 덕분에 세조는 태조 이후 처음으로 궁궐이 아닌 곳에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드는 ‘외방진전’을 가진 임금이 되었다. 외방진전의 존재는 두 임금의 어진이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음에도 수백년 세월의 풍파를 겪고도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현재까지 전하는 어진은 태조, 세조의 것 외에 원종(인조의 생부로 사후 추존), 영조, 익조(헌종의 〃 ), 철종, 고종, 순종의 것이 전부다. 전기 임금의 어진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중에 훼손됐고, 후기 임금의 어진은 6·25전쟁을 피해 부산에서 보관 중이다가 1954년에 화재로 불타버렸다. 

태조 어진은 서울 경복궁의 문소전 외에 함경도 영흥 준원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에 봉안됐다. 창업주인 만큼 지방 곳곳에 어진을 두고 숭배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태조 어진은 임진왜란과 1954년의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전주 경기전의 것이 남아 국보 317호로 지정돼 있다. 1954년 화재 때 불타 왼쪽 눈과 몸통 일부만 남아 전하는 것도 한 점이 있는데, 이 역시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 어진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준원전 어진은 1911년 촬영된 흑백의 정면 사진이 전하고 있어 국립고궁박물관이 2013년 모사본을 제작하는 데 참고가 됐다.

세조 어진은 경복궁 외에 그의 무덤인 광릉 인근에 봉선전을 지어 봉안했다. 후대 임금들은 종종 광릉과 봉선전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의 화를 가까스로 피한 봉선전 어진은 1735년(영조 11년)에 모사되었고, 이 모사본을 보고 1935년 이은호가 초본을 그렸다. 

지방에 따로 보관처를 둔 것이 태조, 세조의 어진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전승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전기에 실록은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네 곳에 보관됐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경기전 내에 있던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됐다. 당시 경기전 관리들이 백성들과 함께 태조 어진과 실록을 전북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냈던 것이다. 조선 정부는 전주사고의 실록을 저본으로 해 실록을 다시 출판한 뒤 춘추관,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다섯 곳에 나누어 보관했다. 지방 여러 곳에 실록의 보존을 위한 ‘백업 시스템’을 두었던 것이 지금껏 실록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비결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