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 오래된 새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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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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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 영 예송문화 연구원장

우리는 오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나 던져 본다. 이 하루의 시작은 어디이고 또 어디에서 마침표를 찍는가? 아니면, 어제는 무엇이고, 오늘은 어디이며, 내일은 존재하는가? 확실한 건 내가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오늘 현재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 이런 허무한 질문의 끝자락에 죽음이 존재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변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진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이러한 죽음을 즐거이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 같다. 태어남이 축복이었는데, 왜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죽음은 어느 누구도 반겨하지 않는 걸까? 죽음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각은 언제 생겨난 것이며, 그러한 시각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 죽음의 길에 무엇이 연결되어 우리 앞에 있는가에 대한 논의 역시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각 중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의례가 있다. 죽음의례를 부르는 명칭에 상례가 있고, 장례가 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이 것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닌 듯 하다.

 이러한 무수한 질문 속에서 하나의 방편으로 시작된 것이 죽음의례를  통해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안타까움에 그간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죽음의례를 바라보고자 연재의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학문의 길에서 만난 선각자들의 큰 도움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이제 조금씩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20세기 후반 현대 인류학을 재창조했다고 평가되는 위대한 인류학자인 “레비스토로스”의 구조주의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레비스트로스는 “현대문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이상한 신앙이나 관습을 목격할 때면, 그것을 고대적 사고의 흔적 또는 그 잔재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고 형태들은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원시적인 사고방식이 자유롭게 표출되도록 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데, 그러한 사고방식은 과학임을 자처하는 다른 길들여진 사고 유형과 공존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양자는 동시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스의 견해를 접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상례와 제례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죽음의례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고자 한다.

흔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해답을 찾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면, 왜 이러한 논의가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제다. 수의에 주머니가 없는 이유가 저승에 빈손으로 가기 때문에 수의에 주머니가 없는 것일까? 제사에 술잔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맞는가? 그리고 제사상에 저분을 구르는 이유는 조상님이 식사를 하시라는 신호일까? 또, 손의 위치가 왼손이 위에 오면 되면 길사이고, 오른손을 위로 하면 되면 흉사를 표시하는 이유는 왜일까? 그리고 이러한 것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고, 어떻게 지금까지 전승되어진 것일까? 과연 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이상의 몇 가지 질문에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다. 그들의 답이 정답인가? 과연 가가례라고 하는 말이 맞는가? 혹은,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이 글을 읽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의 문맹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혹, 당신은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께서 행하셨던 의례를 유심히 살펴본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설에 차린 차례상과 추석의 차례상 그리고 기제사의 상차림이 변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현상을 바라보고 그 현상에 대한 이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 문화 문맹자로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이러한 의문에 한마디로 답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올바른 답은 있다고 믿는다. 그 답은 레비스트로스가 설파한 것처럼 “원시적인 사고는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으며, 자유롭게 표현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죽음”, 그 오래된 새 길을 가다」를 연재하면서 필자가 바라는 바는 여러분들이 오래된 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새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걷게 될 이 오래된 길은 한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던 길이었다. 그래서 잊혀졌던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새로운 물길이 생겨 길이 끊겨버렸고, 앞서 다른 길로 접어들었던 사람들의 흔적들로 인해 그 길을 더듬어 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길에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고 천천히 그렇지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걷다보면 분명 새 길과 연결된 올바른 통로를 얻게 될 것이고,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오래된 길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정표들이 있다. 그 이정표를 올바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잡초 속에 감추어진 옛 길의 흔적과 만나고 새로운 물길로 인해 끊겨버린 길을 연결하게 되고, 사람들이 서성이다 잘못 선택한 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로인해 우리는 반드시 새 길을 걷게 될 것이며,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 있으며, 지저귀는 작은 새의 맑은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길을 시작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준으로 오래된 길의 모든 이정표를 읽고자 한다면 반드시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표는 사라지고 왔던 길조차 잃어버리고 미로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오래된 길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모두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알려줄 이정표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아무것도 분간할 수없는 혼돈 속에서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줄 나침반 역할을 해 줄 기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첫 단추를 끼우고자 한다.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오래된 길가에 사는 사람들이 생각한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서쪽으로 해가 지면서 늘 하늘에 붙어있는 태양을 통해, 그리고 밤하늘 북극성을 기준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있는 북두칠성을 통해 하늘의 모습이 솥단지를 업어놓은 모습을 한 둥근 모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땅에 발을 딛고 서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는 시선이 가는 곳마다 땅, 산 그리고 바다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전체의 모습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하였다.

즉, “하늘은 원(圓)하고 땅은 방(方)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된 천원지방의 표현에 의해 많은 것이 결정지어지게 된다. 이를테면 동양 천문도의 모양이 원형을 기본으로 한 원도로 작성된 것이라던가,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이 원형의 건축물로 구성되게 된 점 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직단은 당연히 방형 즉 사각형의 제단의 모양을 갖추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죽음 의례와 관련하여 뒤에 세부적으로 설명되겠지만, 우리의 독특한 복발형의 무덤형태와 위패의 모양, 비석의 모양 등이 결정되어 진 것이 하늘과 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