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차례나 제사가 왜 문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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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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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지난 다음 ‘조상님들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카페편지함에 올라온 글이다.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귀신들이 모여 서로 신세를 한탄했다. 씩씩거리며 한 조상귀신이 말한다. “추석에 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아, 글쎄 이 녀석들이 교통체증 때문에 처갓집 갈 때 차 막힌다면서 먼동이 트기도 전에 저희들끼리 차례를 지내버렸지 뭔가. 가보니 설거지도 끝나고 모두 다 가버렸어”
두 번째 분통터진 조상귀신이 말한다. “자넨 그래도 나은 편이야. 난 후손 집에 가보았더니 집이 텅 비었더라고. 알고 보니 해외여행 가서 거기서 차례를 지낸다는 거야. 거기가 도대체 어딘지, 어떻게 알고 찾아가겠나?”
아까부터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 있던 다른 조상귀신이다.

“상은 잘 받았는데 택배로 부쳐온 음식이 모두 상했지 뭔가. 그냥 물만 한 그릇 먹고 왔어. 참 귀가 막히더구먼”
뿔이 엄청난 또 다른 조상귀신이다.

“나쁜 놈들 같더니라구! 호텔에서 지낸다기에 거기까지 따라 갔더니 전부 플라스틱 음식으로만 차렸지 뭔가? 신식제사라나 뭐라나? 이빨만 다치고 왔어”
열 받은 다른 조상귀신이 힘없이 말한다.

“난 말이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후손 집에 갈 필요 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갔지”
“그래 인터넷으로라도 차례 상을 받았는가?”
“먼저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해야 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노? 귀신이라고 가입을 시켜 줘야지. 에이 망할 놈들! 이제는 별짓을 다하는구먼”
또 다른 조상귀신이 말한다.

“난 해마다 가는 우리 집으로 갔지. 추석 전날부터 음식을 장만한다고 난리를 쳤더군. 그런데 말이야. 음식이 모조리 외국산이야. 심지어 쌀과 물까지도 외국산이야.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그냥 왔지 뭔가”
이런 일들이 명절마다 한국에서 벌어진다면 과연 명절 차례가 무엇 필요가 있을까? 1800년대에 만들어진 사례편람은 조선 500년의 관혼상제 예식을 정리하여 집대성한 책이다. 5-60년 전만 해도 우리 할머니들은 초상 3번 치르면 집안이 망한다고 할 정도로 상장례 예법에 충실했다. 그 당시만 해도 조상을 섬기는 일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효(孝)와 충(忠)을 일직선 선상에 두었다. 부모를 잘 모시는 효는 나라를 섬기는 충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행의 근본을 효로 생각했다. 효를 기초로 한 제사는 조상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조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조상의 제사를 통해서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다가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로 삼았다. 공자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부모 대하듯이 하라고 했다. 제사를 통하여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례나 제사가 짐이나 고통이 된다면 굳이 지낼 필요가 없다. 제사는 정성으로 드려야 한다. 정성이 없는 제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일부 사람들은 제사 지내기 싫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점쟁이나 예언가들이 제사 지내기를 부추기면 언제든지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다. 제사를 지내고자 하면 제사처럼 지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제사가 자신을 옭아매는 부담이나 고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악령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악한 세력이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본다.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악령의 조종을 받아서 자기 위주의 삶을 살기 원하고 악한 생각을 갖게 된다. 악한 생각은 세상 것들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를 원한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심하게 나타나면 탐심이 되고 그 탐심은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것들을 하나님보다 우선순위에 두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우상숭배는 악령인 마귀와 사단을 섬기는 행위로 유일신인 하나님을 신적 대상으로 두지 않고 마귀와 사단을 신적 대상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제사행위를 통하여 조상을 신적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명백한 우상 숭배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공자는 “사람이 죽어보지도 않고 귀신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조상과 만나는 제사는 지내도록 했다. 유학을 숭상하는 유학자들은 신주를 통하여 조상과 만나기를 원했다. 신주를 모신 경우에는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거일동을 보고 했다. 우리나라 원래 제사방법은 차례(茶禮)였다. 음식을 마련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성을 모아 차(茶)를 올렸다. 그 차 향기를 조상과 후손이 공유하므로 살아 있는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 찬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정화하도록 하는 것을 제사라고 생각했다(아름다운 사람들 35쪽) 명절 차례나 제사가 고통이나 짐으로 둔갑된다면 이미 그 차례나 제사는 의미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산자들이 누려야할 복이다. 만남을 통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축복할 수 있다면 그 자리는 축제의 장이 될 것이다. 그곳이 바로 낙원이 아닐까?

<박철호 시인, 건국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