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묘와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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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4-1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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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죽음을 표현하는 데도 품격과 비하를 담은 용어들이 다양하다. 서거 운명 별세 승화 입적 화천 선종 소천 절명 등…. 종교와 지역, 또는 학덕의 깊이에 따라 정중한 공경어가 원용되기도 한다. 몹쓸 짓을 많이 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자가 사망했을 때는 겉으로야 삼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뻗었다’고도 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사람에 의해 어떻게 불릴지는 스스로 곰곰이 반추해 볼 일이다.

절대 왕권 시절 임금이 진명(盡命)하면 곧 국가의 지각변동이었다. 붕어 승하 훙서 선어 안가 등이 군왕의 몰세(沒世)와 관련된 지칭어들이다. 그런데 제왕의 타계보다도 지고한 수사가 있다. 바로 역책(易?)이다. 증자(506∼BC 436)가 죽음에 임박하여 정갈한 삿자리(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를 바꾸어 깔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이다. 증자는 내성적 학풍으로 크게 존경받았던 공자의 말년 제자다.

우리 역사에도 역책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으니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단지 깨끗한 삿자리를 바꿔 깔고 죽었다 해서 역책이라 불리는 게 아니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후세 사람에 회자되는 것이다.

퇴계는 자신이 죽기 나흘 전 저승길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조카 영(寗)을 불러 유언과 함께 당부의 말을 챙겼다.

“내가 죽은 후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반드시 사양하라.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본관, 조상내력, 입지, 행장만을 간단히 기록하여라. 그리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문(銘文)을 쓰도록 하라.”

예장은 예조(禮曹)에서 도감을 설치해 합당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절차로 당시 종1품 정승직에 있던 퇴계에게는 당연한 예우였다. 그는 국고가 낭비되는 번거로운 장의를 유언으로 사양하고 비문은 스스로 쓴 96자의 한시로 칠십 생애를 요약해 놓았다. 후학들이 자신의 행적을 함부로 미화할까 염려해 지은 그 자명문(自銘文)이 천하제일 문장이다.

명문 내용에는 일생을 검약으로 살며 높은 벼슬에 오르고 만년에는 학문도야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조선중기 거유(巨儒)의 일생이 압축돼 있다. 특히 ‘어찌 내세를 알겠는가(寧知來世), 지금 세상도 알지 못하거늘(不獲今兮)’이란 퇴계의 의중은 유교의 종교성 여부를 가름하는 대표적 문장으로 내세에 치중하는 일부 종교에 경종이 되고도 있다.

그 유명한 명문 비석도 보고 퇴계는 명당 유택에 안식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벽계 조수창 교수(동국대 사회교육원)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동행한 벽계풍수학회 김기선(총무) 김영석 전영식 회원 등도 퇴계 종가와 도산서원을 함께 살펴보는 현장 산(山) 공부에 기대가 크다.

“안산은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갖고 희롱하는 오룡쟁주(五龍爭珠)형이네요. 물길은 우수도좌(右水倒左·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기울어 흐름)하며 수구가 왕양(旺陽)으로 빠집니다. 포태법으로 욕(欲) 방향이니 더없이 좋은 거죠. 놀라운 건 퇴계 선생의 광중(시신을 매장한 자리)이 오룡이 갖고자 하는 여의주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벽계가 묘역에 접근하면서 미리 안산 물형을 파악하고 나서 하는 설명이다.

당판에서는 무성한 나무에 가려 안 보이던 물 건너 안산의 오룡국세가 묘 뒤 용맥을 타고 오르니 극명하게 드러난다. 입수룡맥을 재고 내려온 김기선 총무가 임자(북→서로 7.5도) 쌍산룡에 자(정북)입수(入首) 자좌오향(정남향)임을 확인해 준다.

“입수룡과 좌향이 거의 직룡(直龍)으로 내려왔습니다. 상단부에서 토룡(土龍)으로 넓게 퍼졌다가 혈처에 가까워서는 수체(水體)로 변해 기를 모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봉분 옆의 태극훈(太極暈)을 보세요.”

벽계와 오랜만에 확인하는 당판의 태극훈이다. 면밀히 살피니 1∼2㎝ 높낮이로 몇 겹의 둥근 원이 맴돌고 있다. 이 태극훈의 중앙에 서서 사신사와 물형을 내다보면 따져 볼 것도 없이 명당 조건에 어긋남 없다. 다만 봉분이 태극훈 중앙에서 좌측(묘 전면에서 보았을 경우)으로 50∼60㎝ 정도 빗겨나 있다면서 아쉬워한다.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리며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퇴계는 좌찬성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모 춘천 박씨는 후실이었으나 자애로운 성품의 현모양처여서 아들을 곧고 바르게 양육했다. 20세 때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일생 동안 병치레하며 사는 다병체질이 되었다. 34세 과거급제 이후 단양·풍기군수, 공조·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된 것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퇴계가 벼슬길을 마다하고 손수 집을 지어 제자들을 양성한 서당이다. 지금은 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8년(1575) 당대 명필 한석봉의 친필로 쓴 사액현판이 아직도 건재하다. 퇴계가 죽은 지 4년 만에 서원으로 지어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것이다.

“양기풍수는 여러 채의 건물 가운데 중심 건물을 봐야 하는데 여기서는 전교당(보물 제210호)입니다. 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곳이지요. 청량산 소조하(小祖下) 쌍산룡 임자(북→서로 7.5도) 임(북→서로 15도)입수 계좌(북→동으로 15도) 정향(남→서로 15도)이니 동사택이네요. 계곡이 좁고 경사져 피할 수 없었겠지만 대문 위치가 좌향과 같아서 직사설기(直射泄氣)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왼쪽 간방(동→북으로 45도)의 좌청룡 어깨에 해당하는 산록이 푹 꺼져 있어 팔요풍(八曜風·살기를 띤 바람)이 마음에 걸리나 동서의 병풍 같은 산이 안온하다. 1969∼70년 정부의 고적 보존 정책에 따라 성역화 작업이 이뤄져 면모가 일신됐다.

도산서원을 포물선으로 끼고 돌면 한적한 산골에 퇴계 종가가 있다. 퇴계 묘와 멀지 않은 곳이다. 배산(背山)으로 깔린 가옥의 널찍한 토형체 산이 대궐의 지붕을 닮은 반월형이다. 이 토룡(土龍)맥이 금형(金形)으로 내려와 경좌(서→남으로 15도) 갑향(동→북으로 15도)으로 집터에 와 우뚝 섰다.

“토생금으로 상생하여 생기가 솟는 곳입니다. 뜰 앞의 물이 Y자로 합수되며 화형수(火形水)가 되니 화생토까지 겹쳐 나무랄 데 없는 양택 길지네요. 이 물이 합수돼 퇴계 선생 묘 앞에서 양장수(羊腸水·양의 내장처럼 몇 겹으로 굽이치는 물길)로 감아 도니 상호 보완까지 겸하는 국세입니다.”

빗발이 굵어지더니 계곡물이 급격히 불어난다. 퇴계는 이런 농촌의 고향을 못 잊고 깊은 산중에 초막을 지어 경세가 제자들을 양성해 냈던 것이다. 퇴계는 한국에서만의 스승이 아니었다.

퇴계 학문은 당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의 건설자이자 실천자로 존숭받았다. 또한 개화기 중국 지도자들의 신념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 유학(儒學)의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 형성에도 사상 근간의 주춧돌이 되어 신명(神明)으로 경배되고 있다.

호남의 대유 고봉 기대승(1527∼1572)과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변은 학문논쟁의 최고봉으로 현재까지도 학계의 연구대상이다. 퇴계는 ‘사단은 이(理)가 발하매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매 이가 타는 것이어서 이기가 호발(互發)한다’고 보았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취했고 가치적인 면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하는 주리적(主理的) 입장이었다.

1970년 서울에서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된 이래 경북대·단국대와 대만 국립사범대, 독일 함부르크대 등 국내외 대학에 부설연구소가 개설돼 있다. 미국의 뉴욕, 워싱턴, 하와이 등에도 퇴계학연구소가 조직돼 있으며 1976년 이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독일 등에서 매년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다.

퇴계 학풍을 따른 역사적 인물로는 유성룡 김성일 기대승 이산해 등 260명에 달했고 영남학파와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철학파를 형성하였으니 한국유학계의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퇴계의 학문은 대기만성으로 50세가 넘어서야 완숙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정을 농단한 문정왕후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제13대 명종은 퇴계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응하지 않자 그의 공부하는 모습을 병풍에 그리게 하여 조석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정상에 있다고 누구나 존경 받는 것은 아니었다. 퇴계는 문묘(공자 사당)와 선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전국 40여 곳의 서원에 주사(主祀)되고 있다.

사람의 일생-.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