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서 삶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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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8-1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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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프란치스코(시인, 중앙대 교수)

                                                                                                                            
서울 흑석동에 자리 잡고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바로 옆에 국립서울현충원이 있다. 올해는 현충일을 앞두고 대학원 수업을 현충원에 가서 했다. 이곳저곳 묘소 참배도 했지만, 사진전시관과 유품전시관에 가서 찬찬히 빠짐없이 둘러보면서 애도의 마음을 가졌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다졌다. 우리는 6ㆍ25전쟁도 겪었지만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서도 5000명이나 되는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의 전쟁에 참전하여 돌아가신 분들이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김밥과 생수를 사 갖고 가서 잔디밭에서 먹으면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눠보았다. 둘러본 소감을 물어보니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이렇게 편안히 대학원에 다닐 수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 옆에 있는데도 와볼 생각을 못 했는데, 와서 보니 마음이 경건해지고, 앞으로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장병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에 전사했는데 같이 간 학생들 나이가 20대 후반에서 40대까지였다. 자기보다 어린 나이에 전사했으니 학생들이 현충원에서 숙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제2캠퍼스가 안성에 있는데 공교롭게도 학교에서 안성천주교공원묘원이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스승이자 대부님인 구상 시인과 문단의 동료였던 기형도 시인의 묘소가 있는 안성천주교공원묘원에 일 년에 두세 번은 간다. 이 산 저 산 온통 묘지로 덮여 있어 두 분의 묘소를 찾기도 쉽지 않다. 좀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수만 구의 시체가 몇 개의 산에 촘촘히 묻혀 있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 산에 묻힐지 모른다. 생명체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진리는 모두 사자(死者)가 된다는 것이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죽음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이니, 어떻게 사느냐이다.

올해는 안성천주교공원묘원에 두 번 찾아갔다. 올해가 구상 선생님 10주기인지라 기일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리라 예상하여 미리 찾아가 참배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2004년 5월 11일에 구상 요한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로부터 11년 전에 사모님 서영옥 마리아 데레사가 소천하셨다. 기형도 그레고리오는 1989년 3월 7일 서울 시내 모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급사하였다. 만 29세 나이에.

구상 시인의 시작품 가운데 ‘초토의 시 8-적군 묘지 앞에서’라는 것이 있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로 시작되는 이 시는 천주교 신앙에 기반한 인류애적 사랑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담은 것으로서 전쟁의 비극을 휴머니즘으로 초극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른바 ‘적군 묘지’가 지금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답곡리에 조성되어 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원통, 양주, 대전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시인은 적군 묘지에서 행해진 위령제에 참석했던가 보았다. 국군들이 만들어준 인민군 묘지. 시는 이렇게 끝난다―“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6ㆍ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적이긴 했지만 친척을, 친구를, 이웃을 죽이는 전쟁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지켜낸 우리나라, 우리 땅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묘지에 가볼 일이다. 묘지에 가서는 남은 생을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