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특집-본인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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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8-12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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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림 칼럼]
아니! 저 영정 속 인물은 내가 아닌가? 그럼 내가 죽었단 말인가?

박 회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지금 대학병원 장례식장 천장에 떠 있다. 평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는데 지금은 풍선처럼 가볍다. 분명 육체는 없는데 몸의 감각은 생시 같고 사고도 멀쩡하다.

아뿔싸! 내가 죽었다면 이 일을 어쩐다? 회사 지배구조 바꾸느라 뒤집어놓은 지분관계가 여간 복잡하지 않은데. 잘못하면 회사 다 뜯어 먹히고 말 텐데.

중견기업 오너인 박 회장은 생시같이 안타까워하며 천장에서 내려와 자신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영정 속 사진이 수많은 국화송이에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다. 마누라가 흐느껴 우네. 티격태격 살긴 했지만 날 진심으로 사랑했던 모양이구려. 아직 자태가 곱기도 하지. 하
긴 나보다 여덟 살 아래니 마흔아홉 아닌가. 우리 아들딸도 슬픔에 잠겨 있네. 허이구, 문상객이 많이도 왔구나. 내가 인생을 헛산 건 아닌 모양이구먼!

저기 납품업체 사장들이 다 모여 있네. 어이 안녕하신가? 고맙네. 회사일 바쁜데 이렇게들 와주시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아무도 박 회장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 참 암이란 게 무서운 병이구먼. 수술 경과도 좋다더니 어째 저리 갑자기 가 버리나 그래?” “누가 아니래.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뭣하는가. 저렇게 죽으면 개죽음이지.” “아, 유병언이 욕할 거 하나도 없어. 저 잘살겠다고 주위 사람 피멍 들게 하더니만. 납품가격 독하게 후려쳐서 결국 그 유 사장인가 그 사람 자살했잖어?” 박 회장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

아니 저 저 쳐 죽일 놈이!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상갓집에서까지 남의 마누라를 탐해! 박 회장 부인의 미모에 끌려 젊어서부터 군침을 흘리던 업계 라이벌 천 사장이다. 테이블로 인사 온 박 회장 부인을 색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은근슬쩍 구슬리고 있다. 아니 저 여편네도 그렇지. 말 같잖은 말을 다 듣고 있나 그래!

밤이 깊었는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앞으로도 관계 유지를 잘해야 먹고살 이른바 눈도장 문상객이다.
 
아이쿠 강남 김 마담, 청담동 새끼마담도 왔네?

“이렇게 갈 거면서 염병할? 가게 하나 열어줄 듯 줄 듯뜸은 왜 그렇게 들였나. 할 짓 못 할 짓 다 해줬건만.”

저 새끼마담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구나. 퇴원하면 가게 낼 돈 주려고 했는데 쯧쯧쯧. 가만있자. 아이쿠 저 김 마담, 저 여자 이름으로 사둔 자사주가 수십억어치는 될 텐데 이걸 어쩐다. 십중팔구 꿀꺽할 여잔데. 저쪽 구석에 앉은 정 아무개는 멀리 강원도에서 불원천리 찾아왔네. 고맙기도 하지. 아차차 그게 아니야. 저치가 강원도 내 땅 10만평 차명으로 갖고 있잖은가. 에구 그 땅도 남 좋은 일 시키고 말았네. 화환이 많이도 들어오네. 저기 꽃 배달 온 저자는 최 상무 아닌가? 7,8년 전 실적 나쁘다고 내가 쫓아낸 그 영업담당…. 고생을 해선지 많이도 늙었구나. 늦었지만 여보게 미안하이.

“박 회장 말이야. 매출이 조금만 나쁘면 사람 자르고 임금 깎더니 제명에 못 살고 가부렀네. 하늘도 치부책에 다 적어놓는다잖아. 마음을 곱게 써야제.” 회사 직원들이 한 무더기 빠져나가면서 쓴소리를 뱉어낸다.

“너희들 아직 어려서 물정을 모를 테니 장례 끝나면 회사는 내가 상속해서 회장으로 취임하마.”

“엄마 그건 안 돼요. 엄마는 아빠를 진짜 사랑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장남인 내가 물려받는 게 대외적으로 더 낫다고요.” “엄마 오빠 둘만 그러지 말고 이참에 저한테도 법대로 지분 나눠주세요.”

문상객이 다 떠난 텅 빈 영안실. 처자식이 다투는 소리를 뒤로하고 박 회장은 돌아섰다. 수의(壽衣)에 주머니가 없는 이유를 알겠구나. 다 놓고 갈 걸 뭐한다고, 누굴 위해 그리도 독하게 살았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