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미술관 소장 조선시대 묘지석, 한국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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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22-02-1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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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소장하던 백자청화이기하묘지(白磁靑畵李基夏墓誌) 18점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해외기관에서 소장하던 묘지를 한국으로 돌려보내 준 것은 이번이 첫 사례이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돌이나 도판(陶板)으로, 지석(誌石) 또는 묘지석(墓誌石)이라고도 불린다. 묘지를 통해 고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문중의 경의를 표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1392-1910)에는 무덤 내부에 관과 함께 묘지를 매장하는 것이 중요한 추모 관행의 일부였다. 이 묘지는 조선 후기 훈련대장과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武臣) 이기하(李基夏, 1646-1718)를 추모하는 기록으로, 가족사에서 정치적 업적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백자청화이기하묘지의 글은 조선시대 이조좌랑을 역임한 문신(文臣)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쓴 것으로 그의 문집 『서당사재(西堂私載)』에도 수록되어 있다.

 

총 18매로 구성된 이 묘지는 백토를 직사각형의 판형으로 성형하여 청화 안료로 글씨를 썼다. 판의 우측 단면에는 묘주의 관직 및 이름과 함께 총 매수 중 몇 번째인지 쓰여 있어, 이 묘지가 온전한 한 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묘지명 말미의 기록으로 사후 묘지가 제작된 연대(1734)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청화 발색이 선명하며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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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5년과 2016년 2년에 걸쳐 진행한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 한국문화재 실태조사 시 이 묘지를 확인하였고, 2020년 보고서 발간을 준비하며 한산 이씨(韓山李氏) 문중이 원소장자임을 알게 되어 이를 문중에 알렸다.

 

분실되었던 묘지가 클리블랜드미술관(이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현 한산 이씨 정익공파 문중 대표 이한석 씨는 사실 확인과 이후 조치를 위해 미술관과 교신 등 대응을 재단에 위임하였다. 미술관은 재단과의 협의를 통해 본래 이기하 묘소에 묻혀있던 “백자청화이기하묘지”를 한국에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이기하의 묘소는 원래 시흥군 향토유적으로 1988년부터 지정 관리되다가, 1994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장하였는데, 이때 이한석씨가 묘지를 수습하였다. 당시 묘지는 이장한 묘에 함께 묻지 않고 한산 이씨 문중의 원로가 보관하다가 이후 분실되었다.

 

묘지는 1998년 미술관에 기증되었는데, 미술관은 2020년 말 재단을 통해 이한석 씨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까지 묘지와 문중이 분실한 내용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를 알게 된 미술관은 한산 이씨 종중 대표인 이한석 씨에게 묘지를 돌려주기로 합의하였다.

 

이한석 씨는 한산 이씨 문중을 대표하여, “미술관 역사의 일부인 묘지를 우리 조상에게 되돌려 주기로 한 클리블랜드미술관의 관장 윌리엄 그리스워드 박사는 “우리는 한국의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한 오랜 협력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재단이 이 사안을 우리에게 알렸을 때 모두가 함께 올바른 결과를 위해 노력하였다.”라고 언급했다.


2015년부터 미술관에서 한국 소장품을 담당하고 있는 임수아 학예연구사는 “백자청화이기하묘지는 그 역사적 가치와 단정한 글씨로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유물”이라고 전했다.

 

한편, 미술관으로부터 묘지를 돌려받은 이한석씨는 현재 이기하 선생의 묘소가 충남에 있는 것을 고려하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산하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하였다.

 

연구원은 2021년 1월부터 박물관에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충남 국외소재 문화유산의 조사 및 교류협력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번에 귀환하는 이기하 묘지는 박물관에서 해포 후, 4월 초 기증행사와 특별전시회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조 원장은 “훌륭한 결정을 해주신 클리블랜드미술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그리고 이한석 씨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기증된 유물의 체계적 관리는 물론 관련 연구와 활용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하겠다.”고 전했다.

 

이기하는 조선후기에 훈련대장과 총융사 등을 역임했던 무관으로, 별세 후 ‘정희(貞僖)’ 시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 이 지석이 18세기 조선 상층부를 중심으로 제작된 백자 지석의 전형적인 사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장방형의 백자 지석은 18∼19세기 이후 규격화되었고, 조선시대 도자기로 만든 지석 가운데 왕실과 사대부 계층에서는 지문을 청화로 필사한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색조가 안정된 청화 안료를 사용한 지석들은 아마도 관요였던 분원(分院)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지 말미에는 ‘숭정(崇禎) 갑신 후 91년 갑인(1734, 영조10) 8월 일 구워 묻다(崇禎甲申後九十一年甲寅八月 日 燔埋)’라고 쓰여있다. 특히 이 지석처럼 단정한 해서체로 필사한 것 역시 이 시기 지석의 중요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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