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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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국장례신문 댓글 0건 조회 작성일 14-06-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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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윤(죽음준비교육강사, 호원대 강사)
 
지난 11월 26일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좋은 죽음이란’ 제목으로 강의가 있었다.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죽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50-60대의 남녀가 주로 모인 가운데 가끔 20-30대의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웰다잉(well-dying)이란 말부터 살펴보았다. 웰다잉이란 말을 쉽게 쓰고 있는데, 이 말의 쓰임이 적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영어의 다잉(dying)이란 말은 ‘생명이 끝나가는 것,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우리말의 ‘임종’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럼 지금 임종상태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고 건강한 사람이든간에 무조건 웰다잉이란 말을 써도 무리가 없을 것인가? 임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죽음의 때를 알 수는 없지만 이 말을 같이 적용하여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좋은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서 잘 살아가자고 하는 말은 되지만 그렇다고 지금 모두가 임종(dying)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차라리 ‘좋은죽음(a good death)’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것이 더 적당한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웰엔딩(well-ending)은 이미 쓰고 있는 말이고, 웰고잉(well-going)을 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다. 신조어는 가치를 반영하고 그 사회의 인식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말을 굳이 외국어로 만들어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우리말에도 죽음을 잘 맞이하자는 뜻의 ‘선종(善終)’이란 말도 있고 왕생(往生), 소천(所天), 초종(初終), 돌아가시다, 진명(盡命), 고종명(考終命)등의 좋은 말이 있다. 그럼에도 잘 살아내고, 잘 죽어가자는 말을 굳이 외국어로 만들어서 써야 하는지 묻고 싶다. 우리말이든 외국어든 이렇게 돌려서 어감이 좋은 말을 쓰고자 하는 것은 왜일까. 말 그대로 ‘죽음준비’라는 말이 가장 그 적합성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 그 자체를 쓰기에 주저함이 많다.

 먼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적어보기로 했다. 한 장의 종이를 받아들고 숙연해진 분위기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고 지냄을 반증하고 있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지 않고 살아가기는 매 한가지이다. 금방 적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끝까지 적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웰빙(well-being)하면서 잘 살다가 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 사람도 있고, 현재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면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또 죽음의 순간이 편안해야 한다 등등의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죽음이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좋은죽음은 주위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의견을 나누는 분위기였다. 그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준비하고 맞이하는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는 데 거의 동의를 하였다.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일단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사고사 등으로 갑자기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을 잘 키워내고 적어도 80세는 넘기고 잠자듯이 죽는 고통 없는 죽음을 원하였다.
 죽음준비에는 유언을 하고, 장기기증을 하고, 사전의료지시서를 쓰고, 후회할 일을 줄이고, 용서할 일이 있으면 하고, 용서 받을 일도 받고, 마음으로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주변을 정리하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그 준비가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음준비가 끝났으니 죽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삶이 이제 끝나도 좋다고 생각되어 그만 삶을 마감하고 싶으니 죽게 해달라고 해야 하는가 말이다. 누구나 삶의 방식이 다르듯이 죽음의 방식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죽음이 악수할 그 순간까지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자신의 목숨(命)이 언제 다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자기의 시간을 메꾸어야 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그 사람 참 잘 살았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내 목숨을 내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평소에 가족이 모여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죽음 이야기를 어떻게, 언제 꺼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 년에 몇 번씩 모이는 제사 등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하면 좋겠다고 한다, 옆에서 듣던 분이 사회적으로 죽음이 이슈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죽음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또 다른 한 분이 웰다잉 강의를 듣고 집에 가서 죽음이야기를 꺼내었더니 가족들이 이상하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면서 입을 막아 버리더라고 한다.

 날마다 접하는 죽음이지만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은 아님에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교통사고가 나서 몇 명이 죽었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난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고 자기최면을 건다. 지금 죽음준비 목록을 만들어서 그것이 달성되면 내 마음대로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여한이 없다고 해서 지금 가도 된다는 말인가? 얼마 전 복지관에서 만난 어르신께서 ‘나는 이제 죽고 싶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안락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진지하게 상담을 신청하셨다. 이제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자살은 못하겠고 그러니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신다. 할 말이 없었다. 죽음이 삶과 다르지 않으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고, 잘 살아야 잘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래 이제까지 내가 원하던 방식대로 잘 살아 왔으니 이제 그만 가고 싶다’는 어르신께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가눌 수 있을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데 우리는 그 분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까.

 죽음은 항상 타인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음을 부인한다.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사실은 죽어가고 있고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죽음준비는 내 삶의 끝이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그 때까지 잘 살아내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